주로 웹툰 팬픽을 쓰던 신입입니다만

이번에 수능이 끝나고 롤을 새로 시작하면서 한 번 팬픽에도 도전해 봅니다 ^-^

부족한 실력이나 예쁘게 봐 주세요~

 

*미리 설명. 공식 페이지에는 케일과 같은 천상계 존재들이 '영원히 죽지 않는다' 라고 묘사되어 있지만, 이 팬픽에서는 그 설정을 '조건부 불로불사', 즉 '부상이나 질환이 없을 시에만 영원히 죽지 않는다' 라는 것으로 해석하였습니다.

 

 

 

 

위는 추천bgm-에일리, 얼음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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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독이 끝났습니다, 케일 님."

 

눈처럼 새하얀 살결과 날개에 남은, 가차 없이 찢겨 나간 자리들을 붕대로 감아주며 주치의는 말하였으나 케일에게는 도무지 답을 할 여력이라고는 남아 있지 않았다. 그녀는 누운 자리에서 주치의에게 자신의 동작이 제대로 보이기를 바라며 고개만을 힘없이 끄덕였다. 피곤했다. 한없이 피곤했다. 몸이 마치 그 동안 받아들여야 했던 모든 충격과 비애의 혼돈 속으로 자진하여 묻혀 사라지기를 바라는 듯 끝없이 피곤하기만 하였다. 주치의 쪽에서 자신의 눈치를 살피는지 아무런 미동이 없자 케일은 그러한 피곤기 속에서도 입가에 상황과는 도무지 맞지 않는 실소 같은 것이 떠오르려는 것을 간신히 억누르며 실낱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만 나가 봐라……."

"……아, 예."

"수고했다……."

 

어서 나가 보라는 채근이 다소 무례하게 느껴질 수 있었다는 생각에 그녀는 주치의가 한참 만에 겨우 꺼내놓은 답의 말꼬리를 물며 기력이 쇠진한 속에서도 용케 황급하게 덧붙였다. 주치의는 케일이 침대 위에 눕는 그 순간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거듭 말하였던 '절대 안정'을 다시금 강조하고는, 최대한 천천히 문을 닫으며 방을 나갔다. 그러자 순식간에 그 작고 간소한 방 안을 무거운 적막감이 가득 채웠다. 그녀는 차라리 눈을 감는 것을 택하였다. 그러나 시각이라는 것이 사라진 자리를 더욱 선연히 메워 온 것은 온몸으로 체감되는 그 무거운 침묵이었다. 

 

그대로 묻혀 버릴 것만 같은 그 침묵 속에서 케일은 결국 마지못하여 바깥으로 향하여 있던 주의를 자신의 내면으로 돌렸다. 그제서야 불과 몇십 분 전에 전장에서 겪어야만 했던 그 모든 일의 기억이 몰고 오는 감정의 불안정한 상승 기류가 자신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사실이, 그 느낌이 이미 연속되는 충격으로 너덜너덜해져버린 온 정신을 향해 다시금 확 부딪혀 오는 것만 같았다.

뒤늦게 이미 잔뜩 쉬어서 부어버린 것만 같은 자신의 목구멍을 비집고 또다시 올라와 입 밖으로 확 터져 나가려는 울음을 그녀는 간신히 그 고운 입술을 지그시 깨물어 삼켰다.

 

꿈이었으면 좋겠다. 그러나 꿈이 아니다. 꿈일 수가 없다.

……제발 꿈이었으면 좋겠다…….

 

내가 잃어버린 것들은?

 

 

 

*

 

최후의 전쟁이라는 중한 타이틀답게 전장 위로 펼쳐진 풍경은 정말 참혹하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이미 수없이 쌓여 땅 위를 온통 뒤덮고 있는 동료나 적의, 한때는 피가 돌고 심장이 뛰는 따뜻한 몸이었던 시체들 탓에 발을 디뎌 나가는 것부터가 고초였으며, 그들의 피는 흘러 발 밑의 땅을 자꾸만 붉게 물들여 가고 있었다. 행여나 자신이 지나가는 길 위에 죽은 채 누워 있는 자의 얼굴이 생전에 자신과 친하던 이의 그것일까 두려워 케일은 고개를 도무지 땅으로 한 번이라도 떨어뜨리지 못하였다. 그 참상의 현장을 시야에서 부분적으로나마 가려줄 수 있을 것이었던 투구는 벌써 잃어버린 지 오래였다. 대신 그녀는 전속력으로 달리고 있었다. 다친 날개를 이끌고, 불타오르는 검을 한 손에 꽉 쥔 채 달리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빨리, 1분 1초라도 빨리 이 끔찍한 대학살의 끝을 내기 위해서.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제압해야만 하는 적이 하나 있었다. 그녀는 달려가며 농밀한 분노와 다급함이 가득 차 있는 고함을 질렀다.

 

"모르가나-!!!"

 

케일의 시선이 닿아 있는 곳에, 까마득한 곳에 모르가나가 있었음이었다.

이미 케일의 편으로 기울어 버린 지 오랜 전세를 스스로 직접 하나의 예로써 증명해 보이듯 모르가나의 몸에도 잔 상처나 핏자국이 가득하였다.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적들을 한꺼번에 상대하느라 사방으로 어지러이 흩날리는, 한때는 눈이 부시는 금발이었던 어두운 흑발 아래로, 그리고 똑같이 흑마법의 어둠 탓에 검게 물들어 버린 뒤엉킨 날개깃 사이사이로 더욱 많이 비쳐 보이는 것은 살결의 흰 빛이 아닌 피의 붉은 빛깔이었다. 그나마 저런 난국을 마주하면서도 여지껏 살아 있는 것이 용해 보일 따름이었다.

 

케일의 비명을 듣지 못했던 것이었는지, 아니면 그 소리를 듣고도 자신에게 연신 위험한 마법을 무차별적으로 난사해 대는 적들을 상대하느라 미처 응답할 여유가 없는 탓이었는지, 모르가나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땅이 평탄하지 않았던 탓에 자칫하면 달려가다 발목을 접질러 버릴 것만 같은 불안정한 달음박질로도 케일은 달려가기를 멈추지 않았고, 그녀의 시야에 비쳐 들어오는 모르가나 역시 자신에게로 날아드는 공격에 능수능란한 특유의 솜씨로 재빨리 응수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어서 모르가나를 막아야만 했다. 저런 식으로라면 반드시 이 싸움이 끝나기 전에 목숨을 잃는 사망자가 또다시 추가될 것이 분명하였다.

 

마침내 영원히 좁혀지지 않을 것만 같던 자신과 동생 사이의 거리가 조금 줄어든 것만 같은 생각이 반짝 들었을 때, 그러니까 모르가나가 자신의 목소리를 듣지 않을 수 없는 범위에 이르렀다는 판단이 섰을 때 케일은 다시금 소리를 질렀다.

 

"당장 멈추지 못해!?"

 

그러나, 모든 상황이 뒤집어진 것은 그 때였다.

 

모르가나의 흑마법이 그녀를 상대하고 있던 케일 측 마법사 한 사람의 가슴에 무자비하게 명중하는 것이었다. 순간 케일은 휘청거리다 결국 갑옷을 입어 잔뜩 육중해진 그 몸이 앞쪽으로 휘익 넘어갔다. 주인의 손에서 놓여난 커다란 칼은 그녀보다 몇 발자국 앞에 터엉 하는 무거운 금속성의 소음을 내며 떨어졌다.

 

넘어지면서 그녀가 본 것은, 마치 슬로우모션처럼 본 것은, 무슨 일이 방금 일어났는지를 의식의 어느 어렴풋한 인지의 영역 한 구석으로 깨닫아 버리자마자 자신의 정신을 현실이란 곳에 매어 잡아앉히고 있던 이성이라는 이름의 한 가닥 극세사가 기어이 머릿속에서 뚝 끊겨 버리고 만 것이었는지, 케일의 것보다도 더욱 처절한, 마치 이 세상의 것이 아니라 지옥 밑바닥에서 끌어올린 듯한 분노를 담은 괴성을 지르며, 사망한 마법사의 동료 -혹은 가족- 인 듯한 케일 진영의 마법사가 전력으로 날린 가혹한 일격이 모르가나의 심장이 뛰고 있을 자리를 가차 없이 정면으로 강타해 버리고야 마는 모습이었다.

 

아.

 

……잠깐만.

 

케일이 넘어진 자리에서 두 손과 무릎으로 바닥을 짚고 꿈결같이 멍해져 버린 정신으로 전방을 보는 그 새에도 모르가나의 몸은 이미 실이 끊어져 버린 마리오네트처럼 힘없이 뒤로 무너지듯 내려앉고 있었고, 그녀가 정신을 수습하려는 무의식적인 노력을 기울이기 시작하였을 때 이미 동생은 자리에 쓰러진 지 몇 초가 더 지나 있었다.

바로 그 광경이었다. 파도처럼 밀려들고 만 충격으로 온 정신이 멍해져 있던 케일에게 다시금 찢어지는 듯한 고함을 지를 힘을 준 것은.

 

"공격을 멈춰라-!!!"

 

자신들의 최고 상관이 온통 갈라진 비명으로 내린 명령을 들었음엔지 모르가나를 둘러싸고 있던 이들은 공격을 멈추고 하나같이 동료의 죽음으로 애통한 중에 크게 놀란 듯한 얼굴을 한 채 아직 바닥에서 일어서지 못하고 있는 케일을 쳐다보았다.

더 이상은 손 대지 말란 말이다……! 그러한 자신의 속내를 케일은 이제는 자의에 의해서랄 것도 없이 반사적으로 이어지는 명령으로 그들에게 전달했다.

 

"즉시 퇴각해."

"……하지만……."

"내 말이 말 같지가 않느냐! 즉시 퇴각해라! 사망자를 이송하고 이 상황을 정리하란 말이다-!!"

 

소리를 지르려니 이제는 고개를 정면을 향하여 드는 것조차도 힘들어 케일은 바닥을 향해 푹 수그려진 머리로 연신 비명을 토해 놓았다. 그제서야 마법사들이 마치 석상처럼 우뚝 서서 자신들의 상관을 우두망찰하고 섰던 자리에서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하는 것을, 낙엽같이 힘이 없는 발소리들로 케일은 알 수 있었다. 그 발소리들이 이어 자신의 귀 옆에서 들려오고, 그리고 이내 곧 자신의 뒤로 넘어가 어깨를 타고 들려오다 곧 희미해지는 것까지를 그 자리에서 엎드린 자세 그대로 기다리고 나서, 그녀는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모르가나.

 

아직도 새빨간 화염이 붙어 활활 타오르고 있는 자신의 칼을 도로 집어들 생각조차도 하지 못한 채로, 귓가에서는 어느 순간부터 들려오기 시작한 원인 불명의 윙윙대는 소리를 어렴풋하게 감지하고 있는 채로, 케일은 마치 몽유병자처럼 느린 걸음걸이가 되어 천천히 자신의 동생이 쓰러지고 만 자리를 향해 천천히 걸어가기 시작했다. 마음 속에서는 이미 모르가나가 목숨을 잃고 말았을 것을 알았지만, 믿을 수 없었다. 적어도 자신의 두 눈으로 똑똑히 그 모습을 보고, 두 손으로 더 이상 그 몸에서 생명의 고동이란 감지해낼 수 없음을 스스로 결론짓기 전까지는.

 

마침내 그녀는 멈추어 섰다. 멈추어 서서 자신이 찾던 것을 내려다보았다.

 

"……모르가나."

 

마치 죽은 자의 음성이 되어버린 것만 같은 고요한 목소리로 동생의 이름을 부르던 케일의 눈에 그 순간 비쳐 들어오는 것이 있었다. 바로 전의 순간들에서까지만 해도 흑마법의 기운에 특유의 타오르는 적의가 넘쳐 마치 번쩍거리는 한 쌍의 광원이 된 것처럼 보였던 모르가나의 눈에 어느 새 눈동자라는 것이 다시금 들어앉아 있는 것이. 그리고 역시 흑마법의 영향 탓인지 머리카락처럼 새까맣게 물든 그 두 개의 검은 구슬 같은 눈동자가 케일은 볼 수 없는 이승 너머의 아득히 먼 세계를 공허한 빛으로 응시하는 것이 아니라, 케일의 얼굴이 있는 쪽으로 천천히 흔들리듯 움직여 맞추어지는 것이.

 

아직 살아 있어?

 

"모르가나!"

 

놀란 케일은 마치 탄식과 같은 음성으로 다시금 동생의 이름을 부르며 재빨리 무릎을 꿇고 동생의 상체를 들어올려 품에 감싸고는, 아직도 자신의 얼굴을 향해 고정되어 있는 그 검은 보석 같은 두 눈과 자신의 푸른 빛 도는 눈을 맞추었다. 이미 모르가나의 죽은 빛이 도는 입술가로는 붉은 피가 한 줄기 흘러 파리한 피부를 적시고 있었지만 어찌 되었든, 그녀는 아직 살아 있음이 분명하였다.

게다가 그녀가 죽지 않았음을 보여 주는 증거를 케일은 얼마 못 가 또다시 얻을 수 있었다.

 

"……자기 독단만……그 동안 독단만……."

"……!"

"……지독한 독재자 같으니라고……."

 

입으로는 증오에 찬 말들을 내뱉고 있었지만 제 언니를 올려다보는 모르가나의 눈빛은 증오나 경멸이 담긴 것이 아닌 또다른 무엇이었다. 그 무엇이 불현듯 케일의 마음을 지독히도 아프도록 만들었다.

원망.

 

"……모르가나. 나는 그저 공과 사를 구분하고 싶었을 뿐……."

"그것 뿐만이……아니잖아. 멍청하게."

"……아니라니?"

 

모르가나는 문득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는 자신을 금세 다급해진 얼굴로 주시하는 제 언니의 그 눈빛을 피하여 두 눈을 감았다. 그러는 그녀의 두 감긴 눈에서 흑마법으로 오염된 검은 빛깔의 그것이 아닌, 유리같이 투명한 눈물로 된 빛줄기가 새어 나오기 시작하는 것을 케일은 그 순간 분명히 본 것만 같았다. 아니, 보았다.

 

"……이렇게 희생되어야만 하는 사람이 있는데……어째서 네가 쫓았던 것이 절대적인 정의라고 할 수 있단 말이지?"

"……!"

"찢어져야만 하는 가족이 있고…… 갈라져야만 하는 벗들이 있는데."

 

몸을 들썩이며 흐느낄 기력조차도 없는 탓인지 모르가나는 언니의 팔 안에서 축 늘어진 그대로 미동도 하지 않은 채 눈물만을 흘리고 있었다. 투명한 물방울들은 이내 그녀의 뺨에서 떨어져 땅과 맞부딪혀서는 자잘한 흰 빛이 되어 흩어지며 차갑게 식어 갔다.

한참 동안은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목이 메어 왔고 눈시울이 덩달아 화끈거렸다. 그러나 어떻게든 자신의 속내를 해명해야만 할, 하다못해 구차한 변명이라도 해야만 할 필요를 느꼈으므로 케일은 이윽고 간신히 입을 열었다.

그 동안, 영겁의 시간 동안 털어놓지 못하였던 자신의 마음을.

 

"……모르가나……."

"……."

"네 말이 맞다. 어리석은 건 나였는지도 모르겠다, 내 동생아……."

 

그 영겁의 시간 동안 단 한 번도 사용해 본 적이 없는 단어였던 동생이라는 말로 그녀의 입은 열려 주었다. 제 언니의 말을 일단은 듣고 싶어서였는지 모르가나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런 동생의 옆얼굴을 지그시 내려다보며 케일은 마치 참회하듯 말을 이어 갔다.

 

"그러나, 나 역시 나를 영웅이라는 과분한 말로 받들어 주는 이들을 위해 무언가를 하고 싶었어…… 계속되는 전쟁, 죽어나가는 내 인연들, 네 말대로 찢어져 버리는 가족과 갈라져 버리는 벗들을, 다시는 서로를 마주할 수 없을 곳으로 떠나 버리는 이들을 너무나 많이 봐서였단다……. 내가 상황을 바꾸어 볼 힘이 주어졌으니까. 기나긴 전투 끝에 드디어 내게 이 지독한 상황을 바꾸어 낼 힘이 주어졌으니까…… 내가 생각하는 정의를 위해, 애쓴 것뿐이었다……."

 

더는 가슴이 산산조각나 버리는 듯이 아픈 이별을 감당해 낼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었기에.

최대한 많은 이들의 평화와 안녕을 위하여, 그 안녕을 해칠 여지가 있는 자들을 제거해야만 했다. 물론 어떻게든 살아 있는 존재의 목숨을 강제로 앗는 건 궁극적으로는 정당화가 될 수 없을 것이었지만, 어찌 되었든 케일은 더 이상 누군가로 인해 많은 이들의 행복이 짓밟혀 버리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 기분이 무엇인지를 스스로 너무나 잘 알았기에.

 

자신의 법에 부당한 피해를 입는 희생자가 최대한 생기지 않도록 밤낮을 세워 가며 심혈을 기울여 만든 규율로 사회를 건설했고, 악을 무찔렀으며, 자신이 생각하는 정의를 추진해 나갔다. 초기에는 모든 것이 잘 되는 것만 같았다. 모두들 만족하는 것 같았고, 그 상태로 하루하루가 흘러간다면 어느 순간부터는 분열과 불화란 역사의 먼 뒤안길로 사라져 버린, 영원한 평화가 유지되는 사회를 이루어 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 생각만으로 케일의 가슴이 더없이 벅차 왔던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런데, 그랬는데…… 반대파가 나타난 것이었다……. 네가 포함되어서."

 

그들이 발칙하게만 느껴졌음은 케일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조금씩만 양보하면, 조금씩만 자유를 대신하여 협력하기를 약속하면 이 천상계에서는 더 이상 분쟁이란 것이 일어날 수가 없을 것이라는데도, 그런 목적을 몰라준 채 자신을 폭군으로만 규정하는 이들을 그녀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었다.

 

완벽한 것이란 있을 수가 없음을 물론 케일도 알았다. 그러나 그 완벽이라는 것에 적어도 다가설 수는 있다고 믿었고, 그랬기에 자신이 시작한 그 모든 일들을 강경히 추진해 나간 것이었다. 반대파는 그 노력을 완전히 무시해 버리지 않았던가. 너무나 화가 났으므로 케일은 그들이 자신을 향해 무어라고 말을 하고 싶은지 듣고 싶지조차 않았다. 자신과 자신의 법을 부정하는 이들은 모두들 악이었다. 그래서 용서할 수 없었다.

 

그랬으므로 자신의 유일한 가족인 모르가나에게 자신을 도와 줄 것을 부탁한 것이었다.

 

"……그래도 가족이고, 나를 지켜봐 온 아이이니 넌 분명 나를 따를 것이라고 믿었지만……, 그 당시의 네 생각은 내 예상과는 달랐던 모양이더구나. 그래서 화가 났다. 나는 너를 믿었는데, 그 믿음을 네가 저버리자, …… 네가 마치 나를 배신한 것만 같아서……."

 

그렇게 우리 두 사람은 갈라졌고, 그렇게 우리 두 사람은 끝없이 싸웠고, 그러다 결국 이렇게…….

 

"미안하구나, 모르가나……."

"……."

"……내가, 생각이 짧았다……."

 

상처를 입어 온통 붉게 물들고 만 모르가나의 목 언저리로 케일의 뜨거운 눈물은 기어코 떨어져 모르가나의 심장이 있을 자리를 조금씩 적시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한없이 미안했다. 자신의 고지식함으로 오늘 이 모든 참사를 부르고야 만 것이.

사실은 그러하였기에, 이 날 모르가나를 생포하여 포로라는 명목으로 잡은 다음, 그 동안 털어놓지 못하였던 모든 속마음을 다 털어놓고, 영원처럼만 느껴진 세월 한 번도 할 수 없었던 화해라는 것을 하고, 제 동생이 원하는 것을 들어는 줘 볼 작정이었던 것이었다.

다 소용없게 되어 버렸다. 이제는 모두 부질없는 일이었다. 더 늦기 전에 위험을 감수해서라도 그녀를 찾아갔더라면.

 

"……나를 용서하지 않는다 하여도, 이해할 수 있다……."

 

한참 동안은 그저 이미 끝없이 황량해져 버린 전장 위를 어느 순간부터 부유하기 시작한 안개가 땅 위로 던지는 암울함과, 이따금 그 안개를 걷어내며 두 사람을 가볍게 휩싸고 지나가는 바람의 쓸쓸함만이 존재하였다. 그 적막함이 케일을 되려 두렵게 만들었다. 무겁게 가라앉는 그 고요가 지속되었다간 이내 자신과 모르가나는 그 고요의 빈틈없는 압박에 질식하여 죽어 버릴 것만 같았다. 버티기조차 힘들었다. 숨쉬기조차 괴로웠다.

제발 무어라고 말 좀 해 보거라, 모르가나……. 제발…….

 

"……용서받고 싶다면…… 하나는 약속해 주셔야지."

 

케일의 마음 속 절박한 목소리를 실제 듣기라도 한 것인지, 또다시 길게만 느껴진 몇 분 후에 모르가나가 용케도 입을 열었다. 그에 케일은 어느 순간부터 감고 있었던 두 눈을 번쩍 뜨고 모르가나를 내려다보았다. 동생은 어느 새 옆으로 돌리고 있었던 고개를 다시금 정면으로 되돌려 놓고 제 언니를 가만히 응시하고 있었다. 그 눈빛은 이미 힘이 없었으며, 안타까우리만치 차게 식어 있었다. 더 이상 몸 속에서 태워 낼 생명의 불꽃이라고는 남지 않았다는 것처럼.

 

"무엇을? 무엇을, 모르가나."

"……용서받고 싶거든……."

 

이제는 말조차도 힘에 부치는지, 동생은 잠시 말을 끊고 떨리는 손으로 가슴을 그러쥐며 가쁜 숨을 잠깐 몰아쉬었다. 그 모든 움직임 하나하나가 케일의 눈에는 몹시 두렵게 비치었다. 제발 그러지 말아라. 이제서야 네 말을 들어주게 되었는데, 제발 그렇게 가 버리지 말아라…….

 

"다시는 나와 내 사람들의 것처럼…… 짓밟혀 버리는 목소리는 없도록."

"……!"
"무시당하는 이는 없도록……. 다들 진정 행복해지도록."

 

무엇이라도 해야만 자신에게 엄습해 오는 두려움을 반절이나마 잊을 수 있을 것만 같아, 자신에게 밀려드는 불안을 제공하는 예감을 떨쳐 낼 수 있을 것만 같아 그녀는 바보라도 된 것마냥 당장 고개를 몇 번이고 끄덕여 주며 동생의 손을 한 손으로 꼭 쥐었다.

 

"물론이다…… 물론이고말고……. 그래, 약속하마. 모두를 위해서……."

 

그 순간이었다. 다시는 볼 일이 없을 거라고만 생각했던 동생의 미소를 그녀가 본 것은. 비록 영원처럼만 느껴지던 세월이 지나기 전 자신에게 그 미소를 지어 주던 얼굴과는 조금 달라진 점이야 존재하겠지만, 어찌 되었든 그 오랜 기간 잊고 있었던 방식으로 그 도톰한 입술이, 그 입꼬리가 천천히, 조금은 장난스러워 보이는 특유의 미소로 말려 올라가는 것을.

그 아름답기까지 한 표정을 보는 언니의 마음은 짧은 찰나 두 쪽으로 나뉘더니 이내 천 개의 조각으로 부스러지고 말았다.

안 돼.

 

"……그럼 용서해 주지."

"모르가나."

"……어차피 이제 늦었는데, 용서해 주지 않고 가면…… 우리 둘 다 너무 가엾어지는 게 아니려나."

 

아냐. 안 돼. 무슨 말을 그렇게 해. 안 된다고. 네가 왜 가. 왜 지금 가려고 해. 왜.

방금 전까지 마치 얼이 간 이처럼 무턱대고 끄덕여졌었던 그녀의 고개는 이제 불안정한 가로저음으로 마구 흔들렸다. 왜 가려고 해. 왜. 제발. 안 돼.

 

"사실…… 나도 늘 네가 보고 싶었었지, 케일……."
"……."

"보고 싶었는데……그걸 부정하고 있었던 것일 뿐이었어, 내 마음 속에 있던 가장 간절한 바람을. ……그걸 지금에 와서야 밝히는 나는, 가장 대책이 없는…… 바보이려나."

"……."

"나도 미안해, 케일, 내 언니. 미안해……."

 

이제는 끝이다. 용서해 주었고, 용서를 빌었다. 차마 언니의 대답을 들을 마음은 더 먹지 못하고, 입가에 간신히 떠올렸던 미소를 슬그머니 지운 채 모르가나는 도로 힘없이 눈을 감았다.

힘이 없다. 이제는 쉬고 싶다. 쉬고만 싶다.

 

그 동안 함께해 주지 못해 미안해, 케일.

그 당시의 나도 옳지만은 않았다는 것을 알아 주기를 바라. 나 역시 너무 어리석었지. 조금이라도 더 대화가 오갔더라면 오늘 이렇게 서로 떨어져야만 하는 우리는 애초부터 없었을까.

평행 우주라는 게, 다른 세계란 게 정말로 존재한다면 그곳에 살고 있는 내게 묻고 싶다. 어떻게 했어야 나는, 너와 항상 가족으로, 영원한 가족으로 행복하게 지낼 수 있었을지……. 어떻게 했어야만 우리는 온전한 자매일 수 있었을지.

 

마지막으로 하는 말이 사과였어야만 해서, 그것도 미안해, 케일…….

 

"……부디…… 항상, 잘 지내……!"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자신의 말에 또다시 밀려드는 공포 탓으로 제 손을 놓치고 만 언니의 손아귀에서 모르가나는 기어코 손을 툭 떨구고 말았다. 불과 조금 전까지만 해도 미약하게나마 생명의 기운을 담고 있었던 동생의 두 검은 눈동자는 그 순간 한없이 공허한 두 개의 무저갱 같은 구멍이 되었고, 그 흔들리던 눈빛은 죽음의 낭떠러지로 영영 떨어져 내려가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그 모든 상황이 케일의 마음에 세상 그 어느 무엇보다도 가혹한 한 방의 일격을 날리고 말았다.

어째서. 왜. 왜……. 이렇게 만났는데. 이렇게 만났는데. 드디어 화해했는데……

 

왜……

 

"아……아……아……."

 

더 이상 받아들일 수 없었다. 고통은 그것으로 족하였다.

안 돼. 이게 무슨 짓이냐. 장난하지 말고 제발 일어나. 일어나란 말이다! 제발!!

 

"……안 돼-!!!!"

 

끝없이 황폐하고 적막하였던 텅 빈 전장의 고요를 갈기갈기 찢고, 끝내 마지막 남은 가족을 잃고야 만 언니의 처참한 비명은 바로 그 순간 암울한 공기와 서로 끝없는 파찰을 일으키며 무수히 울려 갔다.

 

 

 

.

.

.

 

 

 

*

누운 자리에서 케일은 한 팔로 두 눈을 가렸다. 그 동안 자신이 꾸준히 세워 왔던 모든 자신의 법과 질서는 이미 그 순간 영원히 부수어져 버린 듯하였다. 자신이 그 동안 무엇만을 보고 달려왔던 것인지, 무엇만을 위하여 살았던 것인지를 그녀는 이미 기억해 낼 수가 없었다. 크나큰 슬픔은 도저히 떨쳐 낼 수가 없는 피곤기만을 불러 왔다. 더 이상은 생각하는 것조차도 무리였다. 그만두고 싶었다.

지상에 사는 이들이란 상상조차도 할 수 없을 기나긴 시간 동안 자신은 대체 무엇을 위하여 이 자리에까지 왔던가. 과연 자신이 잃어버리고 만 것들은, 그리고 그것들이 주는 아픔은, 세월이 흐르면 그저 아물어 흉터가 된 상처를 싸안은 채 그렇게 또 살아'져야만' 하는 모든 지각 있는 자들의 슬픈 법칙에 따라 마음 속에서 차츰 그 존재가 무디어져 가고 말까.

 

과연 그럴 수나 있을까.

그러나 그렇게 되면 영영 잃어버린 것들은 어떡하고. 

 

떠나보내고야 말았던 동생의 그 마지막 표정이, 끝내 스스로는 눈을 감지 못하고 제 언니의 손에 영원히 눈을 감아야만 했던 동생의 마지막 얼굴이 그 순간 자신의 눈앞을 다시금 스쳐 지나가는 것만 같았다.

기어코 흐느낌은 더 이상은 앙다물어지지 않는 그녀의 입술을 비집고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내가 잃어버린 것들은…….

 

 

 

 

 

 

-The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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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고 없이 쓰다보니 분량조절이 안 된 것 같지만...(시선회피)

 

과연 케일은 어떤 마음으로 반대파가 폭정이라 규정할 만큼 강경한 정치를 했던 것인지, 그리고 그 동안 가족임에도 불구하고 사상 차이로 갈라져 있어야만 했던 두 사람의 진심은 어땠을지 표현해 보고 싶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