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대편의 붉은 덩굴정령을 무사히 사냥하고 난 리 신이 막 돌아가려고 몸을 돌렸을 때, 별안간 가까운 곳에서 흰색 실선이 훅 스쳐지나갔다. 그것이 와드를 설치할 때 나타나는 흔적이라는 것을 눈치챈 리 신은 재빨리 몸을 낮췄다. 그리고 감각을 집중해 사위를 경계하기 시작했다. 누굴까.

 

  적 정글 사냥꾼인 엘리스는 조금 전 푸른 파수꾼의 영역 쪽으로 이동하는 것을 확인했었다. 상단 공격로의 헤카림 역시 우리 쪽 피오라가 부탁대로 잘 붙들어 주고 있었다. 지금 위치가 확인되지 않은 적 영웅은 중단 공격로의 신드라와 하단 공격로의 소나 뿐이었는데, 이 시간대에 소나가 하단 공격로와 한참 떨어진 이 지역까지 올라올 리는 없었으니 와드를 설치한 자의 정체는 아무래도 신드라일 가능성이 높았다.

 

  숨을 죽인 채 웅크리고 있던 리 신의 감각에 이윽고 무언가가 걸렸다. 가까운 가시덤불 너머에서 미약한 숨소리가 느껴졌다. 그리 멀지 않은 위치였는데도 발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으로 보아 하늘을 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상대였다. 신드라가 분명했다.

 

  리 신은 먼저 근처 아군의 상황을 확인했다. 피오라는 헤카림과 대등한 전투를 벌이고 있는 와중이라 지원을 오기 힘들었고, 빅토르는 타워 가까이로 밀려드는 미니언들을 처리하느라 중단 공격로에서 떠날 여념이 없어보였다. 스스로 해결할 수밖에 없었다. 리 신은 온 몸을 팽팽하게 긴장시키며 음파를 충전했다. 레벨차이가 두 단계나 벌어져 있다고는 해도, 기습적인 공격과 붉은 덩굴정령 처치로 얻은 잉걸불 문장의 힘이라면 승리를 노려볼만도 했다. 리 신은 결의를 다지며 기척이 느껴지는 방향으로 음파를 쏘아보냈다.

 

  쐐애액,

 

  파공성을 울리며 날아간 음파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목표에 적중했다. 부서지는 소리의 반향으로 주위의 모든 것을 세밀하게 볼 수 있게된 리 신은 지체없이 몸을 날렸다.

 

  "아니?"

 

  그러나 리 신은 날아가는 와중에 적잖이 당황했다.  생각지도 못했던 상대가 거기에 있었다. 풍성한 옷자락과 기다란 머리칼. 품에 안고 있는 커다란 현. 음파에 적중된 상대는 신드라가 아닌 소나였다. 당황하긴 했지만 리 신은 침착하게 소나의 복부에 공명의 일격을 꽂아넣었다.

 

  "!!!"

 

  급작스런 기습을 받은 소나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바닥에 나뒹굴었다. 리 신은 적의 지원이 오기 전에 빠르게 상황을 종결짓기 위해 곧바로 쓰러진 소나에게 다가갔다. 혹시 모를 도주 가능성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폭풍으로 소나를 무력화 시키려던 리 신은 문득 의아함을 느끼고 손을 멈췄다.

 

  "도망치지 않으시오?"

 

  소나는 리 신이 가까이 다가왔음에도 미동도 않고 가만히 있었다. 자신을 지켜줄 유일한 무기인 에트왈조차 손에 들지 않고, 몸을 반쯤만 일으켜 앉은채 처량한 미소만 머금고 있는 모습은 이미 생을 포기한 자와 같아보였다.

 

  "어차피 도망칠 방법은 없었을테니, 현명한 선택이오. 최대한 고통 없이 끝내드리겠다고 약속하겠소."

 

  동정심이 들 법도 했지만 리 신은 개의치 않고 해야할 일을 하기로 했다. 리 신은 합장을 한 번 해보이고 용의 일격을 준비했다. 자세를 취하는 리 신을 보며 소나는 체념한듯 살며시 눈을 감았다.

 

  "이......."

 

  기합을 내지르며 발을 뻗으려던 리 신은 감긴 소나의 눈꼬리가 파르르 떨리는 것을 느끼고 행동을 멈췄다. 꺼림칙한 기분이 들었다. 리 신은 발을 거두고 소나의 심장박동에 가만히 귀기울여보았다. 빠른 고동소리가 느껴졌다. 불안과 긴장, 두려움의 박동이었다. 리 신은 의아했다. 생의 의지를 놓아버린 사람이, 목숨을 잃기를 두려워 하던가? 망설이던 리 신의 머릿속에 불현듯 스치는 무언가가 있었다.

 

  "혹시 공격로에서 쫒겨난 것이오, 아가씨?

 

  리 신 갑작스런 물음에 소나의 눈이 활짝 커졌다. 그러나 곧 놀라서 고개를 도리도리 내저었다. 하지만 리 신은 알 수가 있었다. 역설적이었지만, 볼 수 없게 되어야만 비로소 볼 수 있게 되는 것들이 있었다. 리 신은 그제야 이해했다. 소나가 이 시간대에 이 곳에 오게된 경위가 머릿속에 그려졌다. 잦은 실수로 인한 비난에 떠밀려 어쩔 수 없이 공격로를 버리고 이 먼 데까지 흘러오게 되었을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원망은커녕 아군을 위해 위험한 정글지역까지 홀로 들어와 와드를 설치했다니, 리 신은 새삼 소나의 고운 마음씨에 감탄했다.

 

  리 신은 소나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이해할 수 있었다. 그 역시도 아주 오래전, 중대한 실수를 저질렀던 적이 있었다. 그래서 선택한 수도자의 삶이었다. 중요한 것은 실수 그 자체보다, 그 과오를 되돌리기 위한 미래의 행위였다.

 

  "아가씨. 그대에게 필요한 것은 죽음을 받아들이는 일 따위가 아니오. 그대에게 지금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바로 불과 같은 열정이오. 내가 그것을 되찾는데 도움을 주겠소."

 

  그리고 리 신은 굳은 표정으로 소나에게 다가가 소나의 몸을 덮쳤다. 소나가 놀라서 발버둥쳤지만 소나의 여린 몸으로는 리 신의 단련된 육체를 뿌리칠 수 없었다. 사력을 다해 몸을 비틀어 바닥에 납작 엎드리는 것이 고작이었다. 리 신은 개의치 않고 소나의 옷자락을 부여잡으며 자세를 낮췄다. 자신의 몸 위로 올라타는 리 신의 체중에 몸서리치며 소나는 황급히 에트왈을 향해 팔을 뻗었다.

 

  "그대에게 해를 끼치려는 것이 아니오. 깨달음을 주기 위한 것이오."

 

  리 신은 낮은 목소리로 소나를 안심시켰다. 그러나 소나는 그 말을 믿지 못하고 더욱 거세게 발버둥쳤다. 그 바람에 소나의 옷이 죽 찢겨져 나갔다. 소나가 도통 진정할 기미를 보이지 않자 리 신은 어쩔 수 없다는듯이 고개를 내저었다.

 

  "그렇다면 강압적인 방법으로 할 수밖에 없겠소."

 

  "?!?!"

 

  리 신은 소나의 옷을 거칠게 잡아뜯었다. 그러자 소나의 하얀 등판이 훤히 드러났다. 소나는 소스라치게 놀라서 온 힘을 다해 리 신을 떨쳐내려 했다. 그러나 리 신은 지지않고 소나의 몸을 뒤에서 꽉 끌어안았다. 소나는 거의 울부짖는 표정이 되어서 리 신을 밀어내려 했지만, 그럴수록 리 신의 두 팔이 더욱 단단하게 허리를 조여와서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소나는 절실하게 에트왈을 향해 팔을 뻗었다.

 

  마침내 소나의 손이 에트왈에 닿았다. 그러나 소나의 마음과는 다르게 격정으로 떨리는 손가락이 현 위에서 저절로 춤추며 이제껏 단 한번도 연주해본 적 없던 쾌락의 음률을 뽑아내기 시작했다. 소나의 목 안에서 뜨거운 교성이 왈칵 치밀어 올랐다. 생소한 감각이 온 몸을 관통해서 소나의 머릿속을 새하얗게 마비시켜 버렸다. 소나는 간신히 정신을 붙들고 에트왈을 다독이며 앙탈을 부렸지만, 그럴수록 교태와 같은 선율만이 자아내질 뿐이었다.

 

  "거의 다 되었소. 조금만 더 인내를 가지시오."

 

  소나는 점점 참을 수 없을만치 차오르는 감각에 끝내 굴복하고 말았다. 항상 연주해왔던 고독과 단절감의 음률은 이제 없었다. 소나의 연주는 도저히 그녀가 내리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을만큼 고혹적이고 농염한 선율로 쉴새없이 몰아치다가, 어느 순간 절정에 다다른 듯이 가파르게 솟구치더니 곧 격정에 찬 크레센도로 황홀하게 질주해갔다.

 

  소나의 몸은 이제 불덩이처럼 뜨거워져 있었다. 리 신은 소나의 체온을 피부로 느끼며 익숙한 불길을 떠올렸다. 이 세상 무엇보다 익숙한 감각이 다시 그의 뇌리에 스쳤다. 녹서스의 아이오니아 점령에 항거하기 위하여 스스로의 육신을 연료로 삼아 불탔던 그날. 넘실대는 화염속에 정좌한 채 임종만을 기다리고 있던 최후의 순간에, 리 신은 비로소 영혼 깊숙한 곳에 숨어 있던 내면의 진실을 마주할 수 있었다.

 

  소나 역시도 그런 진실을 마주한다면, 삶의 목적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소나는 이제 호흡마저 곤란해져 있었다. 머릿속이 폭죽처럼 왕왕 울려 제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시야가 온통 새하얗게 물들어서 사위를 분간훌 수조차 없었다. 거친 숨소리와 타오르듯 아려오는 몸의 감각만이 그녀를 일깨우고 있었다. 이제는 더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그만 멈춰달라고 당장 소리치고 싶었지만 벙어리인 소나는 그럴 수가 없었다. 팔에 얼굴을 파묻고 입술만 꽉 앙다물고 있을 뿐이었다.

 

  에트왈의 연주가 잦아들고 있었다. 카타르시스가 임박해왔다. 소나는 소리 없는 비명을 내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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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 삶의 목적을 알겠소?"

 

  가만히 엎드린 채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는 소나에게 리 신이 정중한 어조로 물었다. 소나는 몸을 일으킬 기력도 없다는 듯이 한 손만을 힘겹게 뻗어 에트왈의 현을 당겼다. 감사의 선율이 리 신의 두 귀를 울렸다. 리 신은 알겠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합장을 해 보이고 뒤돌아서 떠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