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흘이 지났고, 연합에서는 조사단과 함께 일단의 병사들이 파견되었다. 믿을 수 있는 유능한 측근들을 뽑아 보냈지만 카르마로서는 그들이 사건의 실마리를 잡을 수 있을 거란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녀도 이렐리아도 이것이 평범한 산적이나 반동집단, 암살자의 짓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 둘은 이미 정의의 전장에서 이 룬테라에 존재하는 수많은 경이를 몸으로 느낀 존재들이었다. 그랬기에 사건 현장의 상세한 사항들을 보고받았을 때, 그녀들은 아이오니아 땅에서 그런 일을 저지를 만한 능력을 지닌 강한 자들을 헤아렸고 몇 가지를 고려해 봤을 때 답은 하나뿐이었다. 그 자는 그녀들처럼 정의의 전장에서 싸우는 챔피언이었고, 아이오니아의 질서에 반하는 위험 인물이었으며 수수께끼에 싸여 있었다. 그에 대해 좀더 알려면 다른 이들의 도움이 필요했다.

그렇기에 이렐리아는 조사단이 파견되기 이틀 전 킨코우의 닌자 요새를 향해 비밀리에 홀로 떠났다. 머릿수가 많아 봐야 좋을 게 없었고 사실상 현재의 연합에서 홀로 움직일 수 있는 요원 같은 존재는 그녀뿐이었다. 전쟁 기관에 출두해야 한다는 핑계로 믿을 만한 부관에게 직무를 맡겼기에 딱히 그에 대해선 걱정할 것이 없었다.

그리고 지금 이렐리아는 아이오니아 깊숙한 곳의 어느 바위산 지대에 와 있었다. 아이오니아라 불리는 군도 지대를 이루고 있는 섬들은 보통 해안지대를 중심으로 도시와 촌락이 형성되었기에 아직까지도 내륙 지방과 산지는 많은 곳이 미개척지였고 지도조차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킨코우는 적어도 5개 이상이라 여겨지는 그들의 닌자 요새를 그런 미개척지에 건설했고, 고대의 룬 전쟁 시대를 건너 지금까지 건재하고 있었다. 지금 이렐리아가 향하는 곳은 그나마 연합의 영역에서 가장 가까운 곳으로, 사실상 유일하게 위치가 파악된 킨코우의 거점이었다.

마치 창날 같은 모양의 한 바위산 중턱즈음에서, 이렐리아는 다소 조심스럽게 말에서 내렸다. 그녀와 말이 나란히 서기엔 다소 위험해 보일 정도로 좁은 길이었고 발 밑은 안개 자욱한 천길 낭떠러지였다. 이렐리아는 평소의 붉은 갑주 차림이 아니라 수수한 검은색의 두건 달린 장포를 걸쳐 마치 수도승처럼 보였다. 

말등에는 봇짐과 함께 거의 그녀의 키만큼 긴 꾸러미가 실려 있었고, 이렐리아는 그것들을 집어들어 메고선 앞을 바라보았다. 안개 때문에 잘 보이진 않았지만 사람 하나 겨우 지나갈 만한 정도의 구름다리가 두 개의 바위 봉우리 중턱을 잇고 있었고, 그 건너편은 지금까지 온 길보다 더욱 좁아 보였다. 말로는 갈 수 없었다. 이렐리아는 말과 마주선 후, 목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어르듯 말했다.


“잠시 기다려야겠구나. 금방 올게. 젤로스.”


플레시디엄의 혈전에서부터 그녀와 함께했던 가문의 말이었다. 그리고 오빠가 실종된 후 그녀는 그의 이름을 말에 붙였지만, 몇 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서슴없이 부르기는 쉽지 않았다. 젤로스는 다정하게 콧김을 뿜으며 푸르릉거렸다. 영리한 녀석이라 딱히 묶어두지 않아도 어딜 가진 않을 것이었다. 이렐리아는 마지막으로 머리를 쓰다듬어 준 후 돌아서서 다리를 향해 걸음을 내디뎠다. 

첫 발을 내딛는 순간, 그녀의 머릿속에 다리가 낡아서 부서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런 생각과는 다르게 구름다리는 삐걱거리는 나무 소리 하나 내지 않았다. 겉보기엔 꽤나 오래되어 보였지만 주기적으로 보수를 하는 모양이었다. 하긴 매일같이 이런 길을 이용하는 이들로서는 그렇게 하는 편이 합리적이지 않을까 싶었다.

이렐리아가 중간쯤 건너왔을 때, 문득 그녀가 걸음을 멈추었다. 어느 새 손은 등에 멘 긴 꾸러미로 향해 있었고 언제 그랬냐는 듯 야수처럼 날카로워진 눈이 전방을 주시했다. 짜릿한 긴장이 그녀의 몸을 달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다음 순간, 안개가 걷히는 듯하면서 다리 반대편에 서 있는 형체가 누구인지 확인되자 이렐리아는 천천히 손을 내렸다. 분명 방금 전까진 보지도 않았고 눈치채지도 못했기에 새삼 닌자란 알 수 없는 존재들이군. 하고 이렐리아는 생각한다. 정의의 전장에선 꽤나 만났지만 바깥에서 보는 것이 이번이 처음이 아닐까 싶었다.


“왜 왔는지는 알고 있소. 근위대장.”


황혼의 눈이라 불리는 남자는 언뜻 느끼기엔 비밀스럽고 음험한 닌자로 보일 수 있었지만 이렐리아는 그에 대해 몇 가지 전해 들은 바가 있었고, 그녀가 가지는 킨코우와 닌자들의 이미지에선 어느 정도 벗어난 명예로운 자임을 알고 있었다. 때문에 그를 경계할 필요는 없어 보였다. 이윽고 다리를 다 건넌 이렐리아는 그 앞에 섰다.


“그러시겠지. 벌써 며칠이 지났는데. 킨코우라면 대충은 알고 있지 않겠소.”


“물론. 헌데 문제는 그런 일에 독자적으로 관여할 수 없다는 점이오.”


쉔은 그 말과 함께 잠깐 고개를 떨구는가 싶더니, 이윽고 고갯짓과 함께 앞장서서 좁다란 산길을 걸어갔다. 아무래도 안내역이 되어 줄 모양이었다.


“윗선들이란, 바깥이나 여기나 크게 다르지 않은 모양이오. 쉔.”


“닌자도 피가 흐르는 인간이니 당연하오...나는 어릴 때 아버지께 그렇게 배우진 않았지만.”


적어도 정의의 전장에서 본 그의 모습은 냉철하기 짝이 없는 목석 같은 인간이었다. 그리고 지금의 그는 그 정도는 아니고, 다소 ‘사람처럼’ 보였다. 비록 킨코우가 아닌 아이오니아인들에겐 소문처럼만 전해지는 이야기였지만, 이렐리아는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림자단의 맹주는.”


그 말에 앞서 걷던 쉔의 뒷모습이 잠깐 흠칫하는 듯했다.


“연합으로서도 위험 인물로 간주하고 있소. 비록...그쪽에선 그 자를 심판하는 걸 의무로 여기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말이오.”


쉔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묵묵히 듣기만 했다. 이렐리아가 알기로 쉔과 그림자단의 맹주, 제드라 불리는 사악한 닌자는 한때 형제였으나 모종의 배신으로 인해 그를 따르는 집단인 그림자단과 킨코우는 죽고 죽이는 항쟁을 거듭하는 사이가 되었다고 했다. 그리고 아무래도 그게 단순한 소문만은 아닌 듯 싶었다.


“그러니 우리 쪽에서도 해야 할 일을 할 것이오. 아실지 모르겠으나, 깨우친 자께선 이번 사건을 그들의 소행으로 여기고 계시오. 나 또한 그렇소. 그래서 내가 여기 온 거고.”


그 말에 쉔은 대답하지 않고 계속 걷기만 했다. 그리고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을까, 거의 산꼭대기쯤 도달했을 무렵 그가 입을 열었다.


“...그래서 혼자 다니시는 게요, 사건의 조사를 위해? 그림자단과 한때 내 형제였던 자가 이 일의 배후라는 걸 증명하기 위해서 말이오?”


이렐리아는 그 말에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한다.


“물론이오. 위험한 줄은 알고 있지만...”


“아니, 당신은 모르오. 그림자단에 대해서도, 닌자에 대해서도, 그에 대해서도.”


쉔은 그녀가 들어 본 것 중 그 어느 때보다도 차갑게 말하더니, 이렐리아가 대꾸할 틈도 없이 가볍게 뛰어 위쪽으로 올라섰다.

그리고 산꼭대기라곤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꽤나 넓은 평지와 함께 그 위에 서 있는 건물이 이렐리아의 눈에 들어왔고, 그건 마치 거대하고 불길한 조각상의 윤곽처럼 보였다. 어느 새 그녀는 킨코우의 닌자 요새에 도달한 것이다. 꼭대기의 안개는 한층 더 짙어 마치 안개로 두른 장막을 쓴 것처럼 보이는 건물이었다.


“가시오. 장로들이 기다리니.”


쉔은 더 이상 말하지 않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이렐리아는 더 말하려 하지 않고 요새를 향해 걸음을 디뎠다. 그녀가 듣기로, 킨코우의 지도자들은 각 영지의 장로들도 쉽게 만나지 않는 자라고 했다. 마치 그 가증스런 아사드와 로하쉬 땅처럼 폐쇄적이고, 그림자와 안개 속에서 살아가던 이들이었다. 많은 전장과 사선을 누벼온 이렐리아로서도 조금의 긴장을 느끼고 있었다.

이윽고 요새 앞에 다다르자, 신기하게도 문이 저절로 소리 없이 열렸다. 장식 없이 그저 검은 칠만을 한 투박한 문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요새 외부에도 아이오니아에선 흔히 볼 수 있는 장식 등은 일체 없었고 오로지 흑색과 어두운 녹색, 회색으로 칠해진 기와와 외벽, 성루만이 있을 뿐이었다. 문 안쪽은 말 그대로 칠흑같이 어두워 짐승의 아가리로 들어가는 듯한 불쾌함을 느끼는 그녀였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갑자기 그 어둠 속에서 불꽃이 확 타오르더니 삽시간에 누군가의 형체가 걸어나와 모습을 드러냈다.


“무기는 지참할 수 없소. 연합의 근위대장이여.”


쉔과 비슷하지만 약간 다른 복장을 한, 전신을 검은 옷과 가면과 간소한 금속제 방호구로 덮은 닌자였다. 한 손엔 횃불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고, 가면 안의 눈은 이렐리아가 등에 멘 꾸러미를 주시하는 듯했다. 그녀는 잠깐 망설였지만, 이내 순순히 등에서 꾸러미를 벗고 땅에 내려놓았다.


“따라오시오.”


닌자는 손짓과 함께 앞장서 걸어갔고 맨몸이 된 이렐리아는 그를 따랐다. 이내 그 둘이 요새 안으로 들어서자, 곧바로 소리 없이 문이 닫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