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등성이에 구름을 걸 듯 높게 솟아오른 두 봉우리 사이를 한 무리의 사람들이 지나고 있었다. 열 명 남짓한 그들 중 말을 탄 한 명을 제외하면 모두가 흉갑과 다리갑옷, 활과 창으로 무장한 모습이었다. 병사들의 가슴팍엔 하나같이 정교한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타오르는 불꽃덩이 안에서 그러쥔 주먹이 튀어나온 모습의 심볼. 남쪽 데마시아나 녹서스의 제식 장비에선 볼 수 없는 특유의 섬세함이었다. 그 일단의 무리가 호위하듯 둘러싼 마차에 드리워진 휘장에도 동일한 문양이 그려져 있었고, 아이오니아라 불리는 땅에서만큼은 그 문양 하나로 그들의 신분이 보장되었다.


남색 칠 일색의 직사각형 차체에 휘장을 두른 모습의 마차는 창문도 뚫린 곳도 없어 언뜻 보면 거대한 보석함처럼 보이기도 했다. 마차를 끄는 두 마리의 말은 이미 여러 번 지나다녀 익숙해진 길을 따라 느긋하게 걸었고, 그건 병사들의 걸음과 얼추 맞는 속도였다.


말 위의 신다르는 조급했다. 이 두 봉우리는 벌써 한 시간쯤 전에 지나왔어야 했었다. 점점 늦어지고 있는 것이었다. 새벽 일찍 출발한 이래로 병사들과 마부를 몇 번이나 재촉했지만, 어쨌거나 자신은 초행길이었기에 유경험자인 이들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장로회의 명령이라 어쩔 수 없었지만 슬슬 이 보급품 호송의 책임자가 된 사실 자체에 화가 나기 시작하는 신다르였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마치 자신이 그 동안 장로회에 바친 충성과 노력이 제대로 보상받지 못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말단 중의 말단에서 시작한 그는 이십여 년이 지나 이제제대로 출세의 길에 들어선 참이었다. 하얗게 세기 시작한 머리카락과 수염, 그리고 아이오니아 사회의 고위 공직자를 의미하는 고급스런 복색이 대략적인 그의 지위와 관록을 말해 주었다.


“좀더 서두를 수는 없느냐.”


신다르는 모두에게 들리도록 소리쳤다. 가장 가까이서 걷던 병사가 말 위로 고개를 돌리며 대답했다.


“늦게 간다고 고개나 관문이 달아나지는 않습니다. 감찰관님.”


몇몇 병사들이 킥킥대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신다르는 잠시 병사를 응시하더니, 다음 순간 말없이 팔을 휘둘렀다. 끝이 다섯 갈래난 말채찍이 병사의 얼굴을 후려쳤고, 한 줄기 날카로운 비명이 봉우리 사이를 울렸다.


“내게 장난칠 생각 마라. 병사.”


연신 고통스런 신음과 함께 허리를 구부리고 얼굴을 부여잡은 병사의 손틈으로 핏줄기가 뚝뚝 흘러내렸다. 그 꼴과 자신을 번갈아 바라보는 다른 이들의 시선을 의식하며, 신다르는 감정을 배제한 목소리로 말했다.


“서둘러라. 해가 지기 전까진 태양 관문에 도착해야 한다.”


그는 그냥 이 일을 빨리 끝내고 내일 귀환해서 장로회에게 임무 완수 보고를 하고 싶을 뿐이었다. 신다르의 명령에 병사들은 다소 가라앉은 목소리로 존명을 표했고, 한 명이 아직도 피를 뚝뚝 흘리는 그를 부축했다. 마부가 채찍을 들어 휘갈겼고, 말들은 짜증스런 울음을 토하더니 좀 더 빨리 걷기 시작했다.


신다르는 잠시 그 모습을 지켜보더니, 이내 말배를 살짝 차 그들을 따라 걷게 했다. 역시 피가 약이군. 손에 든 말채찍을 보며 그가 생각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신다르는 죽었다. 길 왼편의 풀숲에서 느닷없이 날아온 시커먼 궤적이 말과 신다르를 함께 꿰뚫었고, 말이 긴 울음과 함께 땅에 널브러지는 사이 그는 가슴이 뚫린 채 순식간에 절명했다. 다른 이들이 그걸 인지했을 때는 이미 늦은 때였다. 사방의 풀숲에서 그림자처럼 시커먼 형체들, 혹은 무언가들이 날아들어 병사들을 꿰뚫고 베어 죽였다. 그 와중에 들리는 거라곤 희생자들의 갑옷과 몸이 뚫리는 소리뿐, 그 외엔 나뭇잎 바스락거리는 소리조차 나지 않았다. 몇 초밖에 걸리지 않은 참극의 마지막으로 마부의 시체가 마차 아래로 굴러 떨어졌고, 아직까지 이 상황을 인지하지 못한 채 멈춰선 두 마리의 말 앞에 그들이 하나 둘씩 걸어 나왔다.


말의 눈으로 보기에 그들은 하나같이 검은 인간들이었다. 그 중 한 명이 천천히 다가와 양손을 가만히 말들의 미간에 가져다 댔고, 그 손길은 위화감 없이 다정하기까지 했다. 다음 순간, 두 마리 말의 의식조차 끊겼다. 목격자도 생존자도 없는 완벽한 습격이었다.



이틀 후, 아이오니아 연합의 정규군 통수권자이자 근위대장인 이렐리아는 수정궁으로 소환되었다. 수정궁이란 이름은 듣기엔 꽤나 호화로워 보였지만 실은 검소한 도장의 모습과 별다를 바 없는 검소한 성채였다. 그곳은 연합의 전반적인 내정과 분열된 채 장로들이 다스리는 타 영지와의 대외 외교, 그리고 이렐리아가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군사 부분 등 아직 느슨하고 약소한 세력인 아이오니아 연합을 하나의 국가로서 굴러가게 하는 지도부 역할을 하는 곳이었다. 그렇기에 수정궁의 상징성은 상당했다. 무엇보다 그곳엔 참혹했던 녹서스 전쟁 이후 실질적인 아이오니아 연합의 지도자가 된 자가 기거하고 있기도 했고 말이다.


그리고 그녀는 지금 아이오니아의 상징인 쌍두룡으로 장식된 원탁 상석에 앉아 가만히 눈을 감은 채 말없이 두 장로의 말을 듣고 있었다. 막 대전당으로 들어선 이렐리아의 눈에 그 모습이 들어왔고, 그녀는 절로 한숨이 나오는 것을 느꼈다.


“아시겠소, 깨우친 자여? 당장 조사가 필요하오. 그리고 영지간의 무역과 교류에 있어 적극적인 연합의 보호가 필요한 줄로 사료되오. 그렇지 않으면 나보리는 얼마 지나지 않아 아사하고 말 것이오.”


“영지의 치안은 완벽했소. 그런 폭도는 로하쉬 땅에 존재하지 않는다오. 이는 필시 다른 곳에서 영지간의 반목을 노리고 벌인 일인 줄로 아뢰오. 아마 다른 장로들도 충분한 동기가...”


“로하쉬 땅이 아니라,”


어느 새 그들 앞까지 다가온 이렐리아가 말을 끊으며 카르마에게로 다가섰다. 흰 수염이 가슴팍까지 덮은 두 장로의 시선이 동시에 그녀를 향했고, 카르마의 눈이 조용히 떠졌다.


“아이오니아 땅입니다. 아사드 장로님.”


“왔군요. 근위대장.”


신뢰가 담긴 미소가 카르마의 얼굴에 걸렸다. 장로들은 그 모습이 심히 못마땅한 듯했다. 아이오니아 연합이라는 이름 아래, 녹서스 전쟁 이후 하나로 묶였지만 언제나 자기네 영지의 이익만을 위해 반목과 영합을 일삼는 작자들이 장로였다. 적어도 이렐리아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랬기에 장로들은 이 충직하고 올곧은, 그리고 아이오니아 국민의 더할 나위 없는 추앙을 받는 무인을 싫어했다. 공공연히 행해지는 그들의 부정을 그녀가 가로막은 적이 족히 한두 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거 이렐리아 근위대장 아니시오.”


“마침내 도착하셨군.”


로하쉬의 장로회 대표인 아사드. 이렐리아는 유달리 그 노인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녹서스 전쟁 당시에도 가장 피해를 적게 입은 영지 중 하나가 로하쉬였고 은밀히 녹서스 군대와 거래를 했다는 소문까지 도는 곳이었다. 물론 이렐리아는 그게 단순한 소문이기를 바랬다. 실제로 몇 년 전 그녀가 직접 부하들을 이끌고 시찰했을 때, 로하쉬 영지 내에 과거 녹서스와 모종의 관계가 있었다는 그 어떤 증거도 찾을 수 없었다. 하지만...이 노인은 자신과 자신의 영지의 이익을 위해선 그 어떤 일이라도 할 수 있을 거라고 이렐리아는 생각했다. 그녀는 카르마와 장르들에게 예를 갖춘 후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보고는 받았습니다. 태양 관문에서 한나절쯤 걸리는 지점이더군요. 보급 마차도 통째로 사라졌다지요?”


“그렇소. 예전부터 우리 로하쉬 사람들이 쓰던 길이지. 그곳에 뭐가 있는지는 모두가 아오. 헌데 이건 정말로 뜻밖이군.”


아사드의 말은 마치 자기 땅의 치안이나, 자기 사람들의 직무 수행에 있어선 아무 문제도 없었다는 변명처럼 들렸다. 하지만 충분히 피해자인 그의 입장에서 할 수 있는 말이기도 했다. 언제나 중도적인 입장을 유지해야 하는 이렐리아는 그 점을 충분히 고려하기로 했다.


“그렇습니다. 굳이...정의하긴 애매한 곳이긴 합니다만 따지자면 로하쉬의 땅이지요. 어쨌거나 관문 근처에서 일을 벌이긴 힘들었을 테니, 습격하기 좋은 시점이긴 했습니다.”


태양 관문. 그곳은 과거 녹서스 전쟁 당시 초토화되다시피 한 나보리 영지와 타국을 잇는 대 관문이었다. 과거엔 크게 번영했다지만 지금은 그 이름에 맞지 않게 아직까지도 전쟁의 상흔이 남은 황무지이고, 치안을 위해 나보리 민병대와 연합의 군대가 주둔하고 있어 일개 산적들이 습격할 수 있는 곳은 아니었다.


“결국 우리 땅을 잘 아는 자들의 짓이라는 게로군.”


“그렇게 생각할 수 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이렐리아는 사실만을 말하기로 했다. 그녀가 듣기론 그 대단한 킨코우조차도 로하쉬 땅에 대해선 잘 알지 못한다고 했다. 그토록이나 폐쇄적인 땅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내부인의 소행일 가능성이 크지 않겠는가 말이다.


“그렇게 생각하다니 유감일세. 난 우리 백성들을 의심할 생각은 추호도 없네만...그래...”


아사드의 눈이 가늘어지더니 이렐리아를 뚫어지게 응시했다. 그 좁다란 눈구멍 안에서 묘하게 적의가 끓는 것처럼 보였다.


“고려해 볼 가능성이긴 하네...그래, 깨우친 자께서도 그리 생각하시오?”


“저는 치안 문제에 대해선 언제나 근위대장의 의견을 신뢰합니다. 장로님.”


카르마는 여전히 온화한 표정으로 말했다.


“저는 그저 수도자일 뿐입니다. 치안은 잘 모르지요. 이 일은 근위대장에게 일임하도록 하겠습니다. 괜찮지요?”


그건 이렐리아뿐만 아니라 나머지 모두를 향한 말이기도 했다. 이 사건에 있어서 이렐리아는 자신의 대리자이니 그 권위를 인정하라는 의미가 내포되었던 것이다. 짧은 침묵 끝에 나보리 장로가 조용히 고개를 숙이며 순응의 뜻을 밝혔고 이내 아사드 또한 마지못해 그렇게 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윽고 두 장로가 대전당을 나갔고, 카르마는 후 하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이래서 조용히 수도원에 틀어박히는 게 더 좋단 말이죠.”


“그건 저도 동감입니다만 어쩔 수 없죠.”


그녀나 카르마나 탐욕스럽고 고리타분한 장로들을 상대하는 건 영 체질에 맞지 않았다. 그냥 이런 건 아이오니아 연합을, 그리고 국민들을 위한 책임의 하나일 뿐이라고 생각하기로 한 이렐리아였다.


“...그래, 짐작 가는 데라도 있나요?”


이렐리아는 이미 자신의 거처를 나오면서 몇 가지 가능성을 생각해 두었다. 그리고 자기가 생각하기에 그 중 이 사건의 배후세력일 가능성이 가장 높은 곳은 하나였다.


“깨우친 자께서도 들어 보셨을 곳입니다. 이 땅에서 그렇게 아무 증거도 없이 순식간에 사람을 죽이고, 마차를 통째로 약탈해 가기까지 한 후 흔적 없이 사라질 수 있는 자들은 그리 흔치 않습니다.”


카르마도 이렐리아와 같은 생각을 하는 듯했다. 잠시의 침묵이 흐른 후, 그녀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킨코우의 도움이 필요하겠군요. 미리 전령을 보내죠.”


“감사합니다. 어쨌거나 그 자들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는 건 그들일 테니 말이죠.”


킨코우는 만나기에 썩 기분 좋은 자들은 아니었다. 아이오니아에서 가장 비밀이 많았고, 폐쇄적이었으며 연합의 법에서 벗어나 있는 닌자 집단이었다. 무엇보다 그들은 연합의 일원이 아니라 일종의 우호국 같은 존재였다. 솔직히 말해서 이렐리아는 그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엔 그들의 도움이 필요할 줄 그녀는 직감했다.


“그럼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준비를...”


“그래요. 근위대장. 서둘러야겠군요.”


그리고 뒤돌아 대전당을 나가려는 이렐리아에, 카르마는 한 마디를 덧붙였다. 그 말에 그녀의 발걸음이 잠시 멈추었다.


“부디 그림자를 조심하세요. 근위대장.”


이렐리아는 이윽고 대전당을 나간다. 쿵 하고 무겁게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