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됩니다, 폐하! "
" 비켜라, 가렌. 이는 황명이다 "
" 황명이라 하셔도 불가합니다. 폐하가 하려는 것은 자살이나 다름없으십니다! "
" 비키라고 하였다!! 가렌!!! "


학교 1층에 있는 교무실에는 학생들이 모르는 챔피언들만의 비밀 회의실이 있었다.
다른 사람들의 귀에 들어가선 안되는 민감하거나 중요한 사안이 있을때만 이용될 수 있도록 지하에다 교무실만한 크기의 벙커같은 회의실을 만들어놓은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 모든 챔피언들이 모여있었고 출입문 쪽을 불안하고 초조한 기색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문가엔 회의실을 나서려는 자르반을 가렌이 일그러진 얼굴로 막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점차 노기를 띠어가는 자르반이 가렌의 얼굴을 사납게 쏘아보았다.


" 황명에 거역하겠다는 것이냐 "
" 폐하께서 정 그러하시겠다면, 신하된 도리로서 폐하를 강력히 막을 뿐입니다 "
" 오, 오빠 대체 왜 그러는거야! 폐하가 얼마나 생각해서 내린 결론이신데...! "
" 자르반. 당신도 진정하세요. 당신답지 않습니다 "


럭스와 카르마가 둘 사이에 끼어들어 말렸짐나 이미 불은 붙여졌다.
두 남자는 이젠 서로 으르렁거리며 상대방을 향해 명백한 적의를 불태우고 있었다.
실시간으로 일어나는 하극상인데다가, 사이좋은 챔피언의 대표적 예라고도 할 수 있는 그들이 막중한 존재감을 과시하며 마주보고 있는 걸 다른 챔피언들은 어찌할 수가 없었다.


" 하긴....어릴 적부터 너는 끈질기게도 나와 대련을 많이 했었지....그렇다면, 가렌. 그 대련의 끝을 지금 보자 "
" 끝이라....하심은..... "
" 지나갈 수 없다면, 뚫을 뿐이다 "
" .....과연, 그런 결단을 내리셨습니까. 그렇다면 저도 물러서진 않겠습니다 "
" 오빠 진짜 왜 그래!! "
" 럭스, 물러나세요! "


보다못한 럭스가 급기야 소리를 질렀지만 뭔가를 눈치챈 카르마가 급히 럭스를 끌어안고 뒤로 펄쩍 뛰었다.
잠시 후 폭풍과도 같은 강력한 바람이 둘 사이에 휘몰아치더니 각자 리그에 출전할 때 입는 갑주와 무기가 둘에게 착용되었다.
짧은 한숨 뒤 둘은 각자 자세를 취하고 서로를 죽일 기세로 노려보았다.


" 비켜라, 가레에에에엔!!!! "
" 불가합니다, 폐하!!! "




30분 전, 모든 챔피언들이 비밀 회의실에 모였다.
모인 이유는 다들 알고 있었기에 모두 침묵을 고수하며 한 쪽으로 시선을 집중하고 있었다.
제일 상석에 앉은 자르반 4세는 자신에게 꽂히는 수십쌍의 시선을 애써 흘려넘기며 일어섰다.


" 이 자리에 모여준 챔피언들에게 심심한 감사를 표하겠다. 그럼,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겠다.
난, 지금부터 그림자 군도로 가겠다 "
""""" 뭐라고!!? """""


짧고 굵은 폭탄발언에 챔피언들은 경악에 찬 표정으로 자르반을 바라보았다.
데마시아 측 챔피언들은 의자를 박차고 일어서 있었다. 특히 가렌은 자르반이 무슨 말을 했는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듯한 얼굴이었다.


" 이는 조금 전 스웨인, 애쉬를 비롯한 대표자급 챔피언들과 회의하여 내린 결론이다. 이론은 받지 않겠다 "
" 이, 이론 이전에....가서 어쩌려고? "


얼빠진 표정의 카타리나가 그것을 묻자, 자르반은 한번 침을 삼키곤 대답했다.


" 가서....군도의 왕 엘리스에게, 교섭을 시도할 것이다. 현 상황에서 아직 군도는 적으로 간주하기엔 어렵다.
중립을 지키고는 있지만 철저한 중립은 아니지. 공허에도, 이 룬테라에도 붙을 수 있는 것이 저 군도의 존재들이다.
지금 우리들로서 벌어질 전쟁에 대비해 할 수 있는 차선책은, 군도와 동맹을 맺어 공허에 대항하는 것이다 "
" 허....허허허....그딴 말같지도 않은 결론을 지금 차선책이라고....! "
" 그럼, 그 외에 달리 방도가 있나? "


어이가 없는 나머지 헛웃음을 내뱉은 누군가는 그대로 침묵했다.
알고는 있었다. 모두가 알고 있었지만 그것이 차선책이라고 인정하기 싫었던 것 뿐이다.


" 당신 혼자 갈 수는 없잖아. 멀쩡한 놈들 사는 곳이 아닌 만큼 최대한 많은 챔피언들을 데려가야 안전할 텐데 "
" 녹턴의 말이 맞습니다, 폐하! 최소한 저만이라도 동행을 허락해 주십시오! "


가렌이 맹렬히 주장했지만 이미 결심을 굳힌 표정인 자르반은 고개를 가로젓곤 자리를 떠났다.
그에 이를 악 물은 가렌은 출입구로 달려가 문 앞에 서서 자르반을 가로막았다.
놀란 자르반이 멈칫했지만 조용히 가렌의 이름을 불렀다.


" 그곳을 비켜주어라, 가렌 "
" 싫습니다 "
" 뭐...? "


아마 처음이지 않을까, 생각했다. 가렌이 자신의 말에 반대하는 건.
언젠가 신하로서 반대해야 할 것이 있다면 주저말고 말하라고 했었건만, 여태껏 한번도 그런 적이 없었다.
그 때가 지금인가. 슬픈 일이다.


" 싫다고 하였습니다. 폐하. 이 곳을 나가게 해드릴 수는 없습니다 "
" 비키거라. 너와 괜한 말다툼을 하고 싶지 않노라 "
" 안된다고 하지 않습니까!! "




그리고 처음의 장면으로 이어지고, 둘은 서로의 대검과 장창을 맞부딪쳐 칼바람을 만들어내며 진심으로 맞붙어 싸우고 있었다.
리그가 아니기에 스킬 제한도 없다. 사용 가능 아티팩트(아이템)의 제한도 없다. 죽어도 부활할 수 없다.
거대한 히드라의 검기, 드락사르의 황혼검에서 뿜어져나오는 혈기, 유령검의 보랏빛 기운 등 리그에 존재하는 모든 아이템의 오오라가 각자의 살기어린 얼굴과 뒤섞여져 보는 챔피언들로 하여금 지레 경외심을 갖게 하기에 충분했다.
요들들은 소라카가 책임지고 방어막을 펼쳐 흘러나오는 칼바람을 막았고, 다른 챔피언들은 멀찍이 물러서서 안절부절할 수밖에 없었다.


" 흐오오오오!! "


왼쪽 위에서 사선으로 내리쳐지는 대검을 상체를 뒤로 제끼는 것으로 피한 자르반은 장창을 쥐어 땅에 박고 양 발끝으로 가렌의 턱을 두 번 올려쳤다.
퍼퍽거리는 소리와 함께 가렌의 몸이 공중으로 약간 떠올랐고 순식간에 다시 다리를 땅에 붙인 자르반은 몸을 한 차례 돌리며 장창을 가렌의 갑주를 향해 강하게 찔렀다.


" 오빠!!! "
" 크윽...! "


럭스의 외침에 정신이 들었는지 아직 어지러운 표정의 가렌이 검날 옆면으로 자르반의 창을 막아냈다.


" 아, 안되겠어요. 이 싸움은 절대로 잘못됐어요! 빨리 막아야 돼요! "
" 그렇게 둘 순 없다. 럭스 "


참다못한 럭스가 지팡이를 들고 뛰쳐나가자 그 앞을 쉬바나가 가로막았다.
급히 멈춘 럭스는 침통한 얼굴로 외쳤다.


" 저걸 보고만 있으란 말인가요!? "
" 그렇다. 우리가 저 사이에 끼어들 자격따윈 없다. 그저 조용히 보고 있어야 할 뿐 "
" 어째서요! 당신은....당신은 저 둘이 걱정되지 않는 거에요?! "


욱신──


쉬바나가 일순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그 때 럭스가 다시 달렸지만 눈에 힘을 꾹 줘서 정신을 차린 쉬바나가 몸에서 불꽃을 연소시키며 다시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 그렇다 하더라도, 폐하의 뜻이 그러하다면 신하인 우리들은 그에 따를 수밖에 없다 "
" 잘못된 뜻이라 하더라도 말인가요! "
" 그것이 폐하의 뜻이라면, 기꺼이 "
" 이 고집쟁이!! "
" 좋을대로 불러라. 하지만 이 앞은 나도 비켜주지 못한다!! "
" 둘까지 왜 그러는 거에요!! 당장 그만두지 못하겠어요!! "


뽀삐가 둘의 사이에 끼어들어 말리던 사이 자르반은 창을 양 손으로 틀어쥐고 몸을 앞으로 숙였다.
그리고 그의 창 끝에 고밀도의 마력이 모여 압축되기 시작했다. 압축된 마력은 코팅지처럼 매끈하게 창날 전체를 휘감았다.
이윽고 자르반은 그대로 달려 맞은편에 있는 벽을 향해 일직선으로 돌진했다.


" 용살(龍殺)── "
' 이, 이건 용사냥할 때 마무리로 썼던....! '


벽까지의 남은 거리는 약 200m. 자르반이 장창으로 가렌을 밀며 달려가자 그의 주변에 유성을 연상시키는 꼬리를 가진 테두리가 생겨났다.
망자의 갑옷을 장착함으로 인한 패시브 효과도 있지만, 이는 자르반의 Ex 스킬의 이펙트 효과이기도 했다.
용 사냥꾼 자르반의 스킨을 갖기 전 베인과 함께 용을 사냥할 때, 마무리 일격으로 이 스킬을 사용했었다.
그 당시처럼, 장창 끝에 상대방을 매달고, 벽에 힘껏 격돌한다음 달리면서 모아왔던 마나를 초초고밀도로 압축시켜 창 끝에 집중시킨 뒤 다시 한번 더 찌르며, 압축되어 날뛰는 마나를 한순간에 해방시키는──


" ──신주(神主) 죽이기!!! "


콰아앙!!!!!


" 오빠──!!!! "


벽이 무너져 내리는 침몰음에 럭스의 절규는 속절없이 파묻혔다.
쿠르릉거리며 벽의 잔해들이 떨어졌다. 작은 자갈 크기의 돌멩이들이 타탁거리며 뒹굴거리는 때가 되서야 흙먼지에 뒤덮인 장창이 우뚝 솟아났다.
뒤이어 자르반이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신주 죽이기는 맨 마지막에 사용하는 만큼 그에게 있어선 아끼고 아껴두어야 할 필살기였다.
그걸 인간에게 쓰는 일이 없기만을 바래왔던 그였지만, 자신이 가장 아끼는 신하이자 친구에게 쓴 것에 대해 모멸감과 자괴감을 듬뿍 맛본데다가, 스킬의 부작용으로 인한 체내 데미지 누적 때문에 기침을 두어번 한 자르반은 출구를 향해서 털레털레 걸어갔다.
힘없이 축 늘어진 장창이 그의 심정이 어떠한지를 가장 정확히 드러내주고 있었다.


'  미안하다, 가렌. 이런 방법밖에 모르는 한심한 왕을 용서하지 마라 '
" 오빠!!! 오빠!!! "


자르반이 워프 장치로 사라지고 럭스는 곧장 잔해로 달려가 마법을 쓸 생각도 못하고 파편을 허우적거리며 가렌을 찾았다.
그 어떤 충격에도 무너지지 않는 내구도로 설계된 필트오버 과학의 정수가 결집된 방벽이 무너졌다.
파편 하나하나의 무게도 상당하여 결국 제라스가 나서서 파편을 전부 위로 들어올렸다.
그리고 그 밑에 옆으로 쓰러져있는 가렌이 있었다.


" 오빠!! 괜찮아!? "
" 그래....다친 곳은 없어 "
" 잠시만요. 상처의 확인을....어? "


제라스가 파편을 저만치 날려버리고 소라카가 달려와서 가렌의 몸상태를 확인했다.
그러나 가렌에겐 그 어떤 상처도 없었다. 자르반과 맞붙어 싸우던 때 갑주에 금이 조금 생긴 것 말고는 신체에 어떤 상처도 없던 것이다.
가렌은 벌떡 일어나 자르반이 사라진 워프 장치를 바라보았다.


" 어쩔것이냐, 가렌. 다시 쫓을테냐 "
" 아니다, 다리우스....난 더 이상 쫓을 수가 없다 "
" 그런데 어째서, 상처가 하나도 없는 거지요? 둘이 맞부딪친 순간 뭔가가 있었군요 "


혹시 모르니 소라카가 힐을 해주며 가렌에게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그는 잠시 가만히 있더니 이내 모든 걸 털어놓았다.





자르반의 창에 밀려 벽에 닿은 순간, 자르반은 창에 모여있던 마나를 강제로 풀어헤쳤다.
갈 곳을 잃은 마나는 가렌을 휩쓸고 지나가 뒤의 벽에 몰아쳤고, 그 위에 자르반과 가렌이 부딪치자 벽이 무너져내린 것이다.


" 폐, 폐하!! "
" 아무 말도.....하지 말아라 "


다만, 스킬 시전 중에 시전자가 강제로 스킬을 파훼하는 건 본인한테 큰 반작용이 걸리게 된다.
주로 신체의 마비가 오며 심할 경우 그대로 사지의 신경이 끊어져버리는 사태가 발생할 수도 있다.
그걸 자르반의 초인적인 육체가 견뎌내어 다리가 후들후들거리는 것으로 끝났지만, 내장기관에 큰 데미지를 입은 자르반은 거친 기침을 토하며 등 위에 파편을 받친 상태로 말했다.


" 내가 혼자 가는 것은...그들의 경계심을 풀기 위함이니라. 네말대로 대표자급 챔피언들이 모두 간다면 군도의 존재들은 우리를 극도로 경계할 것이다.
허나 내가 혼자 간다면 그들은 그리 심하게 경계하진 않을 것이며, 교섭을 맺는 데에도 좋은 효과를 가져다줄 것이다.
그러니 날 믿어다오. 너희들이 믿는 너희의 왕을 믿어다오. 반드시 무사히 돌아오겠다고 약속하마 "
" ......잘, 알겠습니다. 폐하의 뜻. 따르겠나이다 "
" ......고맙다, 가렌 "




" 시전자 본인에 의한 마법 파훼....그게 사실이라면, 지금 자르반의 몸 속은 엉망진창이에요. 이 벽을 부술 정도의 위력을 가진 마법을 부쉈으니, 몸에 가해진 데미지는 상상을 초월할 겁니다. 얼른 가서 치료라도 해야....! "
" ....큭! "


그 때, 쉬바나가 이를 악물고 워프 장치 위로 달려들어 교무실로 올라왔다.
다급히 창 밖을 보자 절뚝거리며 홀로 교문 밖으로 향하는 자르반의 뒷모습이 보였다.


' 폐하...! '


문으로 나갈 생각도 않고 쉬바나는 그대로 몸을 날려 창문을 깨뜨리며 바깥으로 나와 자르반을 향해 달려갔다.


" 폐하! 폐하!! "
" 쉬바나....? "
" 폐하! 그.....저..... "


이럴 때 자신은 어떻게 하면 좋을까. 소라카처럼 힐을 해 줄 수도, 가렌처럼 용맹하게 그의 앞을 가로막는 것도 할 수 없다.
무심결에 창문을 깨고 나온 것과 평소 남다른 감정을 가진 채 바라봐왔던 자르반과 둘만 있게 되자 쉬바나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고개를 숙인 채 운동장 땅바닥만 바라볼 뿐이었다.
자르반은 그걸 보다가 말없이 손을 그녀의 머리 위에 얹고 쓰다듬었다.


" 아... "
" 배웅나와 준 것이로구나. 그럴 필요는 없었는데, 너도 참 착한 아이로다 "
" 폐...폐하....저, 저는....! "


차마 말을 꺼내지 못할 때, 자르반이 장창을 땅바닥에 세워둔 다음 천천히 그녀를 끌어안았다.
딱딱한 갑주의 느낌밖에 나지 않았지만 자르반한테 안겼단 사실을 깨달은 쉬바나는 화들짝 놀라서 팔을 휘저었다.
극도의 흥분상태가 되어 꼬리와 뿔이 튀어나오고 몸에서 불이 나오기 시작했다.


" 폐, 폐, 폐폐폐폐폐폐.....! "
" 마음을 진정시키거라 "


자비로운 웃음. 그녀가 확실하게 말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따스한 마음을 엿본 쉬바나는 홀린 듯이 입을 열며 품에 머리를 기댔다.


" 기다...리겠습니다. 폐하를 믿고 기다리겠습니다. 꼭, 꼭 약속대로 무사히 돌아오셔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저는...저는.... "
" 음. 짐이 한 약속이니, 무슨 일이 있어도 교섭을 성공시키고 돌아오겠노라. 날 믿는다고 말해주어 고맙다. 쉬바나 "
" 아, 아닙니다, 폐하... "
" 그럼 다녀오마. 내가 없는 사이 데마시아인들을, 이 학교의 사람들을 부탁하마. 넌 우리 데마시아의 수호룡이니까 말이다 "
" 예, 예! "


그 말을 남기고 자르반은 다시 발걸음을 옮겨 교문으로 향했다.
쉬바나는 그저 두 손을 잡고 가슴께까지 들어올린 채 소녀마냥 뒷모습을 바라보는 것 밖에 할 수 없었다.
그녀는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믿고 보내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그 사람도 그녀를 믿고 그가 가야할 길을 걷기 시작했다.
처음 그에게 이끌려 데마시아로 온 순간부터 이미 그녀의 각오는 정해져 있었다.


' 무슨 일이 있어도 폐하가 사랑하는 이 땅을. 이 사람들을 지키겠습니다 '




" 그래서, 어쩔거냐. 엘리스 "


같은 시각, 엘리스의 집무실에서 차를 다 마신 쓰레쉬는 소파에 기대앉아 고개만 돌린 상태로 엘리스를 보았다.
그의 옆에 붙어 앉아있던 엘리스는 기분좋은 얼굴로 쓰레쉬를 바라보다가 잠시 진지한 얼굴이 되어 컵을 내려다보았다.
다 마시고 조금 남은 차가 바닥에 고여있었다. 아까워라.


" 쓰레쉬는....어떻게 하고 싶다고 생각해? "
" 허? 내 의견은 들을 필요가 없지 않나. 동포를 다스리는 수장직은 너한테 있다. 따라서, 군도의 모든 동포는 너의 뜻에 하나로 단결하여 따른다. 나 또한 그럴 뿐 "
" 으응, 그런 딱딱한 대답을 원한 게 아냐. 그리고 그건 이제 질렸어. 난 이번엔 쓰레쉬의 생각대로 움직이고 싶어 "
" 에, 엘리스? "
" 생각해보면 넌 우리 동포들 중에서 가장 머리가 뛰어난 존재야. 리그에서도 온 맵을 시야에 놓고 명령을 내릴 때도 있었지. 그 때 보았던 넌 나보다도 더 훌륭하게 지휘를 했었어 "


엘리스는 조금씩, 아주 조금씩 쓰레쉬와의 거리를 좁혀갔다.
그걸 느낀 쓰레쉬는 당황해서 뒤로 조금씩 물러났지만 그만큼 엘리스는 다가왔다.
이윽고 소파 끝에 다다랐을 때, 엘리스는 쓰레쉬의 가슴팍에 손바닥을 얹고 상체를 숙여 그의 얼굴을 마주했다.
입술과 입술이 불과 1cm 정도의 여유를 두고 있었다. 그러나 쓰레쉬는 일말의 동요 없이 초록빛 안광을 빛내며 말했다.


" 내 개인적인 생각으론, 공허 놈들보단 룬테라의 놈들이 조금이라도 더 괜찮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이번 일에 한해선 인간들 편을 들고 싶군 "
" .....어째서? 무슨 점이 널 끌어당긴 걸까? "
" 그보다 좀 떨어지지 그러냐. 엘리스. 말하기 부담스럽군 "
" 어머, 난 이렇게 말하는 게 더 좋은데? 네 황홀한 영혼의 불꽃을 가까이서 보니 몽롱한 기분이 들기도 해서 말야 "
" 그렇게 띄워봤자 나오는 건 없다. 됐으니까 떨어져 "
" 아잉 "


손바닥으로 꾸욱꾸욱 밀쳐진 엘리스는 귀여운 소리를 내곤 아쉬운 얼굴로 그에게서 떨어졌다.
날카로운 검지 손가락으로 입술을 매만져봤다. 조금 전의 상황이 머릿속에 떠오르고 그 뒤의 망상이 그녀의 머릿속을 지배해갔다.


' 조금만...조금만 더 갔었으면 닿았을텐데 '
" 그리고, 공허놈들 영혼은 맛이 드럽게 없어. 자고로 영혼은 인간들 것이 진짜배기지. 공허놈들이 인간들을 멸종시킨다면 다신 맛보지 못하게 된다는 거 아냐. 난 그뿐이다 "
" 흐음....알았어. 마침 나도 너와 생각이 같았거든 "
" 그렇냐. 그럼, 난 이제 여기에 있을 이유는 없는 것 같군. 먼저 일어서지 "
" 아, 잠깐. 잠깐만. 기왕에 온 거 조금만 더 있다가 가. 어차피 할 것도 없잖아? "
" 없기는. 새 낫을 길들이는 것도 아직 안 끝났어. 덕분에 사형 선고도 어색해서 빨리 개선시켜야 한다 "
" 그러지 말고, 가끔은 나랑 좀 있어주면 안되겠어? 나 외롭단 말야 "
" 엘리스.... "


쓰레쉬는 속으로 그녀를 가엾게 생각했다. 원하지도 않던 수장직을 떠맡게 되어 집무실에 틀어박혀 종이쪼가리를 읽고 승인하느니 비승인하느니 의미없는 작업만 반복하며 살고 있는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쓰레쉬는 얼굴을 벅벅 긁곤 다시 소파에 앉았다.
엘리스가 촉촉한 눈망울이 되어 불쌍한 눈빛으로 그를 올려다보고 있던 것도 한몫 했다.


" 할 수 없군. 조금만이다. 조금만 더 너랑 놀아주지 "
" 정말? 정말이지? "
" 그래. 그보다 이 차 맛있었는데 한번 더 끓여줄 수 있나? "
" 무, 물론이지. 조금만 기다려. 금방 끓여줄게~ "


드물게 신나는 말투로 찻주전자를 향해 종종걸음으로 가는 엘리스를 보곤 쓰레쉬는 옅은 한숨을 푹 쉬었다.
역시 자신은 엘리스에게 너무도 무르다고, 그렇게 생각하며 천장을 올려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