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수직보다 수평을 더 선호하는 유저라 이번 로아온에 별 불만이 없었습니다.
와우를 십 몇 년 쯤 하고 온 유저이다보니 밸런스 문제야 너무 흔한 문제라 짜증은 나도 그리 심각하게 느끼지는 않구요.(현재 버서커 부캐 키우고 있음)
aos 등의 수평 컨텐츠가 롤을 비롯한 현재 강세의 게임들을 능가하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지만, 반대로 아직 롤을 하지 않는 유저에게는 롤에 있는 그 수많은 캐릭터들과 고정화된 룰들을 알지 못해도 해당 장르의 게임을 내가 이미 하고 있는 게임에서 체험할 수 있다는 장점도 분명히 있습니다.(롤은 이제 진입 장벽이 상당히 높아진 상태라고 봄)

수직컨텐츠에 있어서 보상이 부실한 문제, 특히 상위 유저들을 위한 특별한 영역이 부족하다는 점, 어비스 던전의 인식 약세 등이 문제가 된다는 것에 저도 동의합니다.
그리고 저는 그에 더해 관점을 살짝 옮겨서 스토리 적인 부분에 대해서도 지적을 하고 싶네요. RPG에서 영웅, 주인공 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매력적인 빌런의 존재입니다. 빌런의 서사가 어떤 과정과 형태로 유저에게 드러나고, 그것이 유저에게 어떤 감정을 불러 일으키는지에 대한 부분은 유저가 해당 RPG의 진행에 몰입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요소입니다. "내가 저 놈을 잡기 위해서 성장을 하고 싶다."라는 마음을 불러일으키는 요소가 되는 것이죠.

예를 들어 와우에서 리치왕 아서스를 잡게 되었을 때 유저들이 느꼈던 전율은 엄청났습니다. "세상에 우리가 정말 저 놈을 잡는다고? 이건 꼭 잡아야 해." 이런 감정을 불러일으켰죠. 상위 컨텐츠는 눈팅만 하던 라이트유저들조차 이번 만큼은 하드하게 게임을 하고 싶다는 열의를 불러일으킬 정도였습니다. 그만큼 리치왕 아서스의 서사가 유저들에게 깊게 뿌리박혀 있었기 때문이죠. 그에 반해 리치왕 아서스보다 더 큰 빌런이라 할 수 있었던 데스윙의 경우 유저들에게 별로 환영받지 못했습니다. 레이드 과정 자체의 문제도 있었지만(유저들은 타락한 용을 상대로 싸우고 싶었지 촉수랑 싸우고 싶지 않았음), 데스윙의 서사가 다수의 유저들에게 별로 매력을 끌지 못했던 것이 큰 이유였습니다.

지금 로아에서 가장 강력한 매력을 지닌 빌런은 군단장들과 카마인, 카제로스 정도입니다. 그런데 군단장들은 이미 모두 소모되었고(물론 쿠크세이튼, 아브렐슈드는 레이드 후에도 살아있지만) 카멘과 카제로스가 이미 공개되었습니다. 유저들의 입장에서는 메인 빌런들이 "벌써" 소모되는 느낌이지요. 그런데 스마게는 이들의 이야기가 1부에 지나지 않으며, 앞으로 더 많은 이야기가 있다고 합니다. 문제는 그 이야기들이 뭐 하나 제대로 드러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스마게 입장에서는 이런 저런 떡밥들을 통해 이야기를 알리고 있다고 생각하겠지요. 하지만 유저들이 그 떡밥을 제대로 알아보기 어렵다면 차후의 서사에 대한 매력이 없는 상태가 이어지게 됩니다. 아무리 대단한 빌런들이 등장한다 한들, 유저들의 입장에서는 "그래서 걔가 누군데? 뭐, 일단 잡으면 되는거지?" 수준의 듣보잡 빌런이 되는거죠.
지금의 스마게는 서사의 진행에 있어서 너무 "서프라이즈" 식 스토리 텔링에 집착한다는 느낌이 있습니다. "쨘, 사실은 이랬어요."라는 식의 이야기 진행은 유저들에게 한 순간 "우와"하는 반응을 끌어낼 수도 있고, 잔잔한 이야기 진행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반대로 유저들이 수동적으로 이야기에 끌려가는 현상을 만들어냅니다. 유저는 몰랐던 것을 우연히 마주하게 되는 상황이 반복되고, 주어지는 이야기를 그저 겪을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 아만의 스토리가 그렇지요. 유저들은 계속해서 아만의 숨겨진 의중과 행위의 근거를 이해하지 못하고, 뒤를 졸졸 따라다니면서 아만이 움직이는 대로 벌어지는 상황을 수동적으로 "당하게" 되며, 이제는 희미해져가는 아만에 대한 매력을 충분히 되살리지 못하고 또다시 안개 속으로 보내버렸습니다. 이런 스토리 전개는 스토리의 흐름 속도를 조절하고 서프라이즈를 준비하는 데는 도움이 될 지언정, 그 스토리를 겪는 유저들에게 매력보다는 불쾌감을 선사하게 됩니다. 흔히 이런 스토리 진행 착오는 스토리를 진행하는 작가가 본인만 알고 있는 정보와 독자들이 지닌 정보의 격차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경우에 발생합니다. 작가 본인이 지닌 정보를 기준으로 해당 캐릭터에 대한 큰 애정을 당연시 하다보니, 정보가 부족한 독자들이 해당 캐릭터에 대해 작가 만큼 애정을 지니지 못하게 된다는 걸 이해하지 못해서 발생하는 감정의 갭인 것이죠. 제 생각에 지금 스마게 스토리 팀이 아만에 대해 가지는 감정과 플레체까지 진행한 유저들이 아만에 대해 가지는 감정에는 큰 격차가 있다고 봅니다. 그리고 이 격차는 단순히 훗날 서프라이즈로 사실이 공개되는 것 만으로는 결코 해소되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의 스토리 진행에 좀 더 차근차근 아크라시아와 여러 빌런들, 아직 드러나지 않은 새로운 빌런들의 이야기들을 유저가 능동적으로 획득하는 시스템이 더해져야 한다고 봅니다. 카단, 아만, 카마인, 아브렐슈드, 카제로스, 루페온 등의 스토리 속 인물들은 알고 있지만 유저들은 모르는 비밀들을 중심으로 스토리가 진행되는 양식이 마냥 지속되어서는 안 됩니다. 유저들이 모험을 하면서 스스로 정보들을 찾아내고, 또 어떤 부분에서는 스토리 속 인물들이 모르는 정보를 획득함으로써 능동성에 있어 우위를 점하는 영역도 주어져야 합니다. 그 과정에서 여러 인물들과 빌런들의 서사를 마주하게 되면서 그들의 영향을 유저들이 체감하고 어떤 방향으로든 매력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유저들이 "다음에는 어떤 빌런을 상대하게 될까? 와, 저 빌런을 상대하게 되다니... 저 놈은 꼭 내가 잡고 싶어." 이런 기대감을 가지고 차후를 꿈꾸게 됩니다.
"그래서 이제 뭐함?"이라는 웃긴 질문은 단지 수직적 보상만의 영역을 가리키는 질문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스마게 스토리 팀에서는 스토리 텔링의 형식에 있어서 이런 부분을 좀 고려해주면 좋을 것 같습니다. 와우의 스토리 텔링이 새로운 영웅과 빌런의 매력적 서사를 전개하는데 실패하면서 몰락했다는 사실을 기억해주세요. 로아는 부디 다른 길로 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