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와우를 처음 접한 건 대학교1학년 때였다.

 

와우 이전의 나는 전형적인 콘솔유저였다.

 

혼자 여유롭게 즐길 수도 있고, 경우에 따라선 파고들기가 가능한 jrpg의 전성시대였기에

 

플스로 쏟아져 나오는 소프트도 제대로 즐기기에 부족한 때였다.

 

 

대학에서 알게 된 형과 수업을 마치고 캠퍼스를 걸어 내려오면서

 

같은 관심사였던 게임 얘기를 신나게 하는 중간에

 

"너 그럼 와우라는 게임 안해봤어? rpg 좋아한다며 한 번 해봐"라는 말을 듣고

 

호기심이 동해 집에 오자마자 와우를 검색해보기 시작했다.

 

 

mmorpg라는, 다른 유저들과 함께 실시간으로 한 서버에서 게임을 한다는 것이 쉽게 상상이 되지 않았지만

 

호기심, 기대, 설렘이 한데 뒤섞여 뭐에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클라이언트를 설치하고 계정을 결제하고 있었다.

 

 

내 맘을 한번에 사로잡았던 검정타우렌남캐전사를 생성하자 내 눈앞에 펼쳐진 건 드넓은 멀고어 초원이었다.

 

처음에 퀘스트를 받고 내 머리속에 떠오른건 물음표 뿐이었다.

 

'지금 이 넓은 땅덩어리를 두 발로 뛰어가면서 돌아다니라고?'

 

화려한 전투씬, cg 일절 없이, 나무 망치를 양손에 들고 붕붕 휘두르는 내 캐릭터를 보며 어이없음 반 신선함 반이 섞인 웃음이 튀어나왔다.

 

새파란 뉴비인 데다가 외부 애드온 등도 거의 존재하지 않았기에

 

퀘스트 내용을 전부 읽어가며, 막히는 부분은 인터넷에 검색을 해가며 거의 꼬박 하루를 초반 퀘스트에 투자하고 잠을 자려고 누웠는데,

 

잠이 오지 않았다.

 

멀고어 초원이, 그 필드 위의 11렙짜리 타우렌 전사가,

 

눈 앞에 있는 듯 아롱아롱거리는 것이었다.

 

당시 개인 컴퓨터 없이 가족 전체가 마루에서 컴퓨터 한대를 쓰고 있었던 터라

 

잔소리 듣는 걸 싫어하는 내가 억지로 몰컴을 하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그날, 거의 처음으로 발에 양말을 신고 발소리를 죽이고 나가서 새벽에 컴퓨터를 부팅시켰다.

 

부팅음이 천둥소리처럼 들렸더랬다.

 

 

그렇게 정신없이 와우에 빠져들었다.

 

처음 분쟁지역으로 들어가 얼라이언스 유저한테 죽고 분노했던 날.

 

와이번조련사에게 와이번을 얻어 타고 하늘을 날면서 육두문자 섞인 감탄을 내뱉던 날.

 

예체야키가 출몰하는 나무 아래에서 물빵을 먹다가 뒷통수 맞고 죽었던 날.

 

 

그리고 무엇보다, 처음으로 통곡의 동굴에 파티원 5명이 모여 "모험"을 했던 날.

 

"롤 플레잉" 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온몸으로 느꼈던 그 짜릿한 순간을 잊을 수가 없다.

 

각자의 역할 분담, 커뮤니케이션, 실수, 다툼, 화해, 협력, 미로, 탐험, 거대한 보스, 전리품, 이야기.

 

어릴 적 책으로만 읽었던 멋들어진 판타지 세계를 이런 식으로 체험할 수 있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2시간 넘게 걸린 통곡의 동굴 한 바퀴 이후 쉽게 사그라들지 않았던 뉴비의 엄청난 흥분.

 

불성 이후 각 확장팩의 최종 레이드 컨텐츠를 빠짐 없이 즐긴 나이지만

 

갓 18레벨을 찍고 들어간 통곡의 동굴에서 느꼈던, 형언키 어려운 감동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화면에 등장하는 모든 장소를 두 발로 밟을 수 있다는 신기함.

 

어디로 향하든 플레이어의 자유라고 말하는 짜릿한 방종.

 

동료들과 함께, 멋진 세계를 더 멋진 세계로 만들 수 있는 체험.

 

가상을 넘어 피부에 와닿는 현실이 되었던 시간들.

 

 

길을 잃어 도착한 산봉우리에서 지는 노을을 내다보며 이상하게 먹먹해졌던 순간.

 

헤엄치다 우연히 발견한 산소방울에서 캐릭터와 함께 숨을 둘렸던 순간.

 

사냥을 마치고 나무 그늘 아래에서 투박하게 앉아 빵을 먹던 캐릭터를 보며 턱을 괴던 순간.

 

절벽아래 넘실대는 거대한 바다와 그 위로 비춰진 태양을 바라보다, 나도 모르게 절벽 아래 푸른 바다로 뛰어내렸던 순간.

 

 

접었다 폈다 해가며, 거의 9년이라는 시간을 와우와 함께하고 있는,

 

뉴비의 풋풋함이라곤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늙은이지만

 

내 시간 한 축에 아주 소중하게 남아있는 그 파릇파릇한 시간과 감정의 색은 쉽게 바래지지 않는 것 같다.

 

 

그리고 또 하나 자신있게 말 할 수 있는 것은,

 

바로 내가 했던 게임이 "와우"였기에 이같은 "추억"을 가질 수 있었다는 사실.

 

와우는 내가 생성한 캐릭터의 허구 속 이야기가 아니다.

 

바로 나 자신의 이야기이자, 성장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