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분들이 KT가 너무 뻔해서 졌다고 생각하는데, 저는 거기에 반만 동의하고 나머지는 항변을 하고 싶은 게 있어 길게나마 글을 적습니다.

결과가 나오고 나서 과정에 대한 비난을 하는건 쉽지만, 어째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자세히 들여다보면 거기에는 나름의 합리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이번 결승전의 밴픽은 그런 양상이 많았습니다.



1경기는 다소 평이한 밴픽이었습니다. 양쪽 모두 준비해 온 것을 다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그저 하던대로, 혹은 누구나 예상할 만한 밴픽이었죠. 마지막 페이커의 피즈픽이 다소 의외라고 생각할만한데, 이는 에코랑 놓고 고민했던 것에서 볼 수 있다시피

신드라를 상대로 킬각이 나오면서, 스플릿구도에서 유리한 카드였기에 픽했다고 생각합니다.

1경기에 대한 제 생각은, 밴픽대로 KT는 잘했고 다만 KT에서 마타선수의 2번의 패착이 가장 큰 요인이라고 생각합니다.

바로 "말자하 궁"인데요. 중반까지 KT가 다소 유리하게 게임을 이끌었던건 말자하 궁-애쉬 궁으로 이어지는 연계로 피즈를 막아 낼 수 있었기 때문이죠.

하지만 딱 2번, 룰루를 끊고자 날린 애쉬의 수정화살을 리신이 대신 맞고, 시야가 없는 상황에서 피즈가 오기전에 리신을 끊고 싶었던 마타선수의 궁 연계 선택이 결국 리신도 못 끊고 피즈도 못 자르면서 경기가 뒤집히게 되죠.

그리고 마지막, 제이스를 살려주고자 말자하가 궁을 썼는데 제 생각엔 바로 옆에 붙어있던 리신에게 잘못 클릭한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아마 피즈를 잡아두려던 게 아닌가 생각하는데, 하필이면 그 타이밍에 피즈가 리신과 바로 옆에 붙어있는 바람에 리신이 걸려버리면서 게임은 끝납니다.




1경기에서 눈여겨볼건, KT와 SKT의 애쉬와 룰루에 대한 생각입니다. KT는 

1. 애쉬는 현재 봇라인전에서 말자하, 카르마, 룰루 등의 서폿과 같이 서면 막을만한 조합이 없으며

2. 또한 애쉬의 궁으로 선공권은 애쉬쪽이 가지기 쉽다.

따라서 애쉬는 가져오면 밴 되지 않은 적당한 서폿으로 봇의 주도권을 확실히 잡을 수 있다고 생각하죠.

그렇기에, SKT의 룰루선픽이 룰루-애쉬 조합에 대한 견제구라고 생각했던 거 같습니다. KT 입장에선 룰루가 아니더라도 아쉬울 게 없으니 좋고

반대로 애쉬 말자하 혹은 애쉬 카르마 같은 조합 상대로 뽑을만한게 많지 않기에 크게 걱정을 안했을 겁니다. 실제로도 너프먹고 힘이 좀 빠진 바루스가 나왔구요.



이러한 생각이 2 3 경기에서 KT가 준비해 온 전략을 명약관화하게 보여줍니다. KT는 싸우지 않고 이기는 선택을 합니다.

이건 KT가 평소에 보여주는 취향인거 같은데, 강력한 라인전과 스노우볼링조합, 그리고 1차타워 철거 이후 131 스플릿.

이를 통해 골드차를 벌여서 싸우기 전에 이겨놓고, 통계적으로 이긴다는 게 KT의 전략입니다.

이는 합리적이죠. 정규시즌에서도 이 조합을 들고 재미를 많이 봤을 뿐 아니라 실제로 SKT와의 경기에서도 시종일관 초반에 유리한 구도가 많았으니까요.

다만, SKT 혹은 타 팀들에게 글골차를 크게 벌여 놓고도 경기를 굳히지 못해 이따금씩 한타로 뒤집히는건 KT에게 한타조합을 짜야한다는 생각이 아니라,

가능하면 한타를 피하고 스마트한 운영으로 더 빡빡하게 해보자는 식의 피드백이 들어간 것 같습니다. 요컨대 우리가 실수만 없으면 무조건 이길 수 있다는 계산인거죠.

그렇기 때문에 애쉬가 더더욱 핵심입니다. 131구도를 만들어주고, 라인관리 하느라 바쁜 적을 이니시를 통한 선공권으로 끊어먹을 수 있으면서 초반 라인전도 센 카드. KT의 메타에 대한 해석은 소위 이득충이라고 할 수 있는 싸우기 전에 이긴다를 담고 있습니다.


거기에 대해 SKT는 라인전이 강한 픽으로 맞선 것이 아닙니다. 탑은 대놓고 밀리는 픽들을 뽑았고 봇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다만 컨셉은 가지고 있죠. 보호막 조합으로 원딜을 지킨다는 것.

어찌보면 한참 철지난 생각입니다. 룰루가 너무 크게 너프를 먹고 소라카는 리메이크되버렷습니다. 한때 유행했던 카르마는 세이브 능력이 애매하고 후반에 힘이 빠집니다. 케일은 불안정합니다. 서포터형 탑이나 미드로 쓰기엔 다들 너프먹고 쓰기가 힘들어졌기에 예상하긴 쉽지 않았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럼에도 이 전략을 들고 나왔기에 양 팀이 룰루에 대해 지닌 생각이 극명하게 갈리죠.

KT는 룰루를, 애쉬-룰루조합에 대한 견제픽 이상으로는 보지 않았던 것으로 봅니다. 

밴픽의 백미였던 3경기를 보자면, 오히려 카르마 픽으로 미드 서포팅을 막아두는 정도만 하죠.



이 또한 합리적입니다. 룰루는 라이너로 서기엔 너무 약해요. Q너프이후 라인에서 주도권을 가지기 힘듭니다. 르블랑과의 구도에서 불리하진 않지만 반대로 선공권은 항상 르블랑이 가지고 있죠.

결국 KT는 물어본 겁니다. 너희 룰루 어차피 서포터인데, 카르마 말고 트위치 지켜줄 미드라이너가 있느냐.

이는 리신밴 역시 맞물립니다. 봇은 이길 조합을 1 2 3 경기 전부 쥐어줬는데 리신 때문에 1 2 경기에서 그 힘이 잘 나오지 않았다는 생각이죠.

어차피 리신만 막아두면, 비슷하게 픽으로 가져갈 게 엘리스 밖에 없을것이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KT는 블루 사이드이기 때문에 리신막고 애쉬를 가져오면 트위치 지키기 조합은 못할거라 계산했겠죠.

이 KT의 합리적인 예상에 대해 SKT는 너무나도 무난한 그레이브즈와 룰루를 다시 가져오면서 KT의 생각에 동조하는 듯 합니다.



쐐기는 카르마픽이었죠. 엘리스 안하고 그브를 뽑은데다가, 카르마까지 뺏으면 사실상 트위치 조합은 없다. 저도 여기까진 KT의 완승구도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SKT는 다음픽으로 트위치를 뽑습니다.

그리고 2번째 밴이 시작되죠. 사실상 상대가 트위치조합을 다시 짠다면 남은 카드가 뭘까. 일단 탑쉔을 짤라서 적의 의도를 한번 짜릅니다. 그리고 마지막 밴카드를 질리언에 던집니다.

전 여기서 KT가 이겼다고 확신했습니다. 남은 카드가 없다고 생각했거든요. KT입장에선 엘리스와 아이번이 짤려서

남은 정글픽이 애매해진건 사실이지만 그래도 카르마를 가져왔기에 적 조합을 완벽히 차단한 효과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KT는 큰 고민하지 않고 무난한 렝가와, 2경기에서 보여줬던 르블랑을 다시 가져옵니다. 131, 초반에 좋은 스노우볼링, 그러면서 암살능력과 선공권

폰 선수가 좋아하고 잘하면서, 거기에 KT가 가장 자신있어 하는 구도를 만들 조합을 완성합니다. 탑밴이 참 많았기에 제이스에 맞설 픽이 마땅히 없었던 SKT는 그라가스를 선택했지만 KT 입장에선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죠.

오히려 예상 외의 카드는 나미였습니다. SKT는 가면을 던지고 미드룰루를 공인해버리죠. 이렇게 뽑고 보니 르블랑과 룰루 구도, 거기에 그브와 렝가와의 2:2 까지 생각한다면

미드룰루가 생각보다 나쁜 픽이 아닌게 됩니다. 즉 미드룰루로 고정해놓고 보니, 정글 그브가 KT에 주기 싫어서, 혹은 애매해서 가져간 게 아니라 룰루를 보좌해줄 딜을 맡을 카드가 된 셈이죠.

그래도 여기까지 본다면 KT의 상식적이고 합리적인 픽이 결코 나쁘진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KT는 1 2 3 경기 내내 탑과 봇에서 라인전을 이길 픽을 골랐고

미드는 라인전과 스플릿 사이에서 고민한 흔적이 보입니다. 둘 다 충족해주기엔 르블랑이 가장 무난했단 거죠.


KT의 1 2 3 경기 픽들은 굉장히 합리적이었습니다. 하지만 너무 허망하게 져버렸죠. 이는 KT가 지닌 초반 공격성, 주도권에 대한 성향을 확실하게 드러낸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실제로도 그것을 가장 잘 해 왔구요.

다만 이번 결승에서의 패배는 전략이 뻔했다거나 단순했다의 의미가 아니라, 그 이상으로 KT의 유연성과 고집에 대해 한번쯤 재고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한타에 대한 자신감이 없을까? 혹은 그 한타에서의 불확실성을 제거하고 싶었을까?

리스크가 적은 플레이는 지지 않을 수 있을지 몰라도 반대로 이기는 것도 쉽진 않습니다. 게임을 이겨야 할 때 이기지 못하면 승부의 행방이 묘연해지죠. KT의 경기를 보고 있자면 그런 생각이 듭니다. 자신들의 게임을 계산해서 이끌고 싶어하지만,

만약 이기지 못했다면, 계산이 잘못된 걸까 계산대로 하려던 게 잘못된 걸까. 지금까지의 KT는 계산대로만 하려다가 무너졌다면,

이젠 어떤 선택을 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