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이란 혼돈에서 나온 본질적인 무언가를 보유한 상태를 말합니다. 그리고 군주는 그 본질적인 무언가를 질서 아래 지배하는 상태를 말하죠.


이그하람과 태초부터 존재하던 자들은 전자의 주인 형태, 카제로스와 군단장들은 후자의 군주 형태를 하고 있습니다.


스스로를 심연의 군주라 칭한 카제로스는 
악마들을 창조하며 순식간에 혼돈의 세계를 평정했다.
~
심연의 세계에 익숙했던 그들은 마침내 
혼돈의 진정한 주인이었던 이그하람을 소멸시키는데 성공한다.

- '이그하람의 죽음' 중 

우리는 카제로스와 아브렐슈드에게 갑옷을 하사받아 어둠의 주인이 된 카멘을 보았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건 금강선 디렉터님이 이 시점의 아브렐슈드를 '몽환의 군주'나 '몽환군단장'이 아닌 '몽환의 여왕'이라 칭했다는 점입니다. 카멘과 카제로스는 아브렐슈드가 군주가 되기 이전에 만났다는 뜻이겠죠.


심연의 군주는 어둠의 주인이었습니다. 어둠의 주인이란 어둠을 손에 그러쥔 자. 카제로스는 이때 카멘에게 자신이 가진 어둠의 권능을 건네주었다는 뜻이 됩니다.


자신의 권능을 하사한 카제로스는 군주라는 시스템을 정립하기 위한 여정을 시작했고, 저마다 무언가를 지배한 주인들을 하나둘 질서의 길로 포섭하거나 처리하며 군주가 될 적당한 그릇들을 찾아다녔을 것입니다.


카제로스가 군단장을 차근차근 임명할 때 어둠의 주인 카멘은 어둠을 다스리며 페트라니아 절반을 평정했습니다. 그리고 이후 성공적인 그릇으로서 군주의 자격을 부여받았죠.


반면 쿠크세이튼은 군주라는 칭호로 불린 적이 없습니다. 광기의 그릇은 광기를 지배하지 못하고 손에 쥐는 것에 그쳤기 때문일 겁니다.



▲군단장 헬 컨텐츠를 모두 정복하면 지급되는 아이템의 설명

군단장을 상대로 승리하는 것은 여러 혼돈의 힘을 겪고 극복해 내는, 군주의 그릇이 되어가는 과정입니다.


계승자 루테란은 국왕이자 리더였지만 군주의 그릇은 아니었습니다. 직접적으로 상대한 것은 발탄 뿐, 나머지 군단장들은 아크의 힘을 에스더들에게 나누어 토벌의 책임을 분담했기 때문이죠.


반면 모험가는 에스더의 결정적인 간섭 없이도 군단장 토벌이 가능하도록 설계되어 있습니다. 모든 기믹 파훼는 에스더 스킬을 쓰지 않아도 가능하도록 되어있고, 지급되는 에스더 무기조차 필수적으로 강화해야 하는 장비가 아닙니다. 에스더는 사슬전쟁 당시의 위용과는 달리 정말 토벌에 도움을 줄 뿐인 존재가 되어있죠.


루테란이 카제로스를 봉인하기로 결정한 것은 루페온을 마주했기 때문일 겁니다. 질서의 신은 자리에 없습니다. 질서가 없다면 혼돈의 고삐를 쥐고 있는 심연을 없앨 수는 없겠죠. 담을 그릇이 없는 혼돈은 아크라시아를 아수라장으로 만들 것이니까요. 그렇기에 그릇이라는 희생의 책임을 미래의 계승자에게 맡기며 봉인한 것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지금 시점의 누군가와 공명했다면 모험가의 활약상을 모두 보았을 테니까요. 모험가는 소위 말하는 짬처리를 당한 것이죠.

 

그렇다면 심연은 과연 무엇이 목적일까요?


붉은 달이 꺼질 때, 차원은 뒤틀릴 것이다.

혼돈의 기둥이 질서를 꿰뚫고

태초의 손길이 태양을 빚어내면

빛의 의지는 심연으로 굴복할 것이다.

메마른 침묵 속 스스로의 길을 선택한 자는 심연으로 가라앉는다.

심연은 마침내 눈을 뜨고

운명의 빛이 그를 섭리의 저편으로 인도하리라.

아득한 시간을 넘어.. 이제 예언의 때가 왔다.

오래도록 기다려왔던

끝이 시작된다.


- '운명의 빛' 속 카제로스의 대사


어둠의 주인과 심연의 군주는 같은 말이었죠. 심연과 어둠을 치환해 보면 어딘가 익숙한 흐름입니다. 카오스 게이트가 열리고 거짓된 태양이 하늘을 밝히자 빛의 의지를 이어온 땅 루테란은 어두운 하늘 아래 굴복하고 맙니다. 절망적인 상황에서 모험가는 바라트론 속으로 들어가는 선택을 자처하게 되죠.


이제 심연은 마침내 눈을 뜰 것입니다. 완성된 군주의 그릇 안에서.

 


혼돈의 마녀가 말했지.

붉은달이 꺼질 때 차원이 뒤틀릴 것이다.

그렇게 운명은 반복되리라...

혼돈의 기둥이 질서를 꿰뚫고

태초의 손길이 태양을 빚어내면

빛의 의지는 심연으로 굴복할지어다.

운명의 궤적이 돌고 돌아

만물이 혼돈으로 회귀하는 날.

모든 것이 새롭게 시작되리라.

빛과 어둠은 다시 혼돈으로 돌아가

질서를 바로 세울 주인을 정하리라.

순리가 무너져 역리가 되고

역리는 순리가 되어 바로 서리라.

심연의 군주가 돌아오리라.


- 아브렐슈드 레이드 중 마녀의 예언


사슬전쟁 당시에는 루테란 때문에 실행하지 못했던 빛과 어둠이 혼돈으로 돌아간다는 예언. 그 예언의 때가 새로운 별이 출현하며 다가왔습니다. 끝이자 새로운 시작, 심연은 이것을 기다렸던 겁니다.


그럼 광기는 무엇이 목적일까요?


그는 고요하고 광기에 가득 찬 혼돈을 이야기합니다. 고요하다. 아마도 그건 어둠을 의미할 겁니다. 광기는 자신의 도화지가 빨간빛 광기로 물들면 주체할 수 없이 흥분하는 모습을 보이면서도 어둠과 광기가 공존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아마 어둠이라는 무채색 속에서 빨갛게 빛나는 광기가 가장 아름답다 생각하는 것이겠죠. 광기가 질서에 굴복한 이유는 그 이유에서일 겁니다. 모든 것을 혼돈으로 되돌릴 태초의 어둠을 손에 쥐기 위해서.



▲광기에 잠식당한 아만을 보며 세이튼이 내뱉은 말


그런 의미에서 모험가의 행보는 광기에게 흥미로웠을 겁니다. 본래 아만이 걸어야 했던 길을 비집고 들어온 운명의 별. 아만이 견뎌야 했던 순례길은 다른 방향으로 틀어졌고, 그릇의 길은 모험가가 걷게 되었죠. 그야말로 새로운 배우의 등장인 겁니다.


군단장 자리에서 벗어난 쿠크세이튼은 왜 모험가에게 서커스를 열어줬을까요? 더이상 앞에 나설 이유가 없음에도 말이죠. 어쩌면 군주의 칭호를 정당하게 넘기기 위해서가 아닐까요? 모험가가 군주의 그릇이 되어 어둠을 삼키려면 우선 모든 혼돈의 힘을 겪고 이겨내야 할 것이니까요.



▲군단장 토벌 상자 설명 중 '이겨낸 자'


이 토벌 상자 설명 중에서도 주목할 만한 키워드가 있습니다. 왜곡된 몽환. 왜곡이란 단어는 할과 연관이 있죠. 아브렐슈드는 할처럼 큐브를 사용합니다. 그리고 재미있게도 아브렐슈드가 다스리는 몽환과 악몽 모두 왜곡과 연관이 있습니다.



▲일리아칸 계승 장비의 아이템명


아브렐슈드는 카멘이 나타남과 동시에 다가와 어둠을 건넸습니다. 어떻게 바로 그럴 수 있었을까요? 저는 카멘이 아브렐슈드가 만든 악몽이라 생각합니다.


O derelicta, clama

울부짖어라, 떨어진 자여

O umbra, clama

울부짖어라, 그림자여

O imperfecta, clama

울부짖어라, 완성되지 못한 자여


- '몽환의 아스탤지어' 중


떨어진 자 dērelictā는 위에서 아래로 추락한 자가 아닙니다. 버려진, 동떨어진, 떨어져 나간 등의 분리된 자를 뜻합니다. 그리고 우린 아브렐슈드의 악몽 속에서 프로켈의 분열을 보았습니다. 일찍이는 악몽의 존재 모르페도 보았죠. 현실의 인큐버스 모르페는 악몽으로 왜곡되어 악몽의 모르페가 만들어졌습니다.



▲현실 결계와 악몽 결계의 두 모르페


만약 카멘이 악몽이 만든 왜곡된 존재, 분열된 존재라면 태초부터 존재한 자들이 카멘을 이상하다 느낀 것은 당연할 겁니다. 그는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허상이니까요.


현실과 허상의 경계는 허물어져

혼돈의 권좌에 앉을 왕들이

각자의 칼날을 뽑아 부딪혀

딱 세 번의 절규를 들을지어다


- '몽환의 아스탤지어' 중


빛과 어둠은 다시 혼돈으로 돌아가

질서를 바로 세울 주인을 정하리라.


- 아브렐슈드 레이드 중 마녀의 예언


혼돈의 권좌는 모든 것이 태초로 돌아간 혼돈 속의 왕, 주인의 자리를 뜻합니다. 어둠의 군주 카멘은 페트라니아 절반을 평정하며 이미 혼돈의 권좌에 앉을 힘과 자격을 증명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제 모험가라는 군주에게 토벌당해 울부짖을 것입니다.


그리고 군주의 그릇이 완성될 때,


태초의 빛은 끔찍한 악몽으로 다시 태어날지니


- '몽환의 아스탤지어' 중


끔찍한 악몽은 현실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