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일(昨日), 적의 망라를 피하겠다는 알량한 이기심으로, 기어이 아군의 수호자(守護者)를 사지(死地)의 구덩이 속으로 직접 밀어 넣어 참살(斬殺)해 버렸소.


...그 참극(慘劇)이 벌어진 무대는 제4막(第4幕) 아르모체의 제2관문(第2關門)이었소이다. 사방을 물샐틈없이 겹겹이 조여오는 철갑의 마군(魔軍)들의 포위망 속에서 적의 숨통을 끊어내고 그 자리에 엎드려 숨을 죽여야 파훼(破毁)하는 망라 속에서… 본인은 눈앞의 생존에 눈이 멀어 기어코 아군의 수호자(守護者)를 사지로 내몰고 말았소.



천우신조(天佑神助)로 적병의 숨통을 끊어내고 그 잔해 속에 엎드려 숨을 죽이는 것까지는 완벽하였소. 허나… 파훼를 목전에 둔 그 찰나! 아군 수호자가 본인의 발치에 차원을 잇는 시퍼런 환영문(幻影門)을 개방해 두는 것이 아니겠소!

​아아… 눈앞에 아른거리는 저 영롱한 빛의 통로를 도저히 외면할 수 없는, 이 천박하고도 저주받은 '상호작용의 본능'을… 본인은 도무지 참아낼 재간이 없었소이다!
본인의 알량한 이성은 완전히 마비되어 기어이 그 금지된 문고리를 부여잡고야 말았던 것이었소!!



금지된 문을 넘어 수호자(守護者)의 등 뒤로 당도하여, 서로의 체온이 살갗에 스밀 만큼 두 육신을 애틋하게 감싸 안은 바로 그 찰나였소!

​아아, 전장의 신은 이토록 가혹하단 말이오! 찰나의 온기를 음미하기도 전에 무정한 적의 망라가 발동하더니… 기어이 우리 두 사람을 유일한 생존의 성역 바깥, 참혹한 사지(死地)의 한복판으로 사이좋게 걷어차 버리고 말았소이다.



허나 본인이 누구이더냐! 신법(身法)의 쾌속함에 있어 둘째가라면 서러울 암영(暗影)의 자객(리퍼) 아니겠소. 축출당하기가 무섭게 본능적으로 그림자를 가르며 다시금 은폐의 성역으로 기어 들어와 알량한 목숨을 도모하였소.

애석하게도 수호자의 발걸음은 태산처럼 무거웠더구려. 미처 성역의 문턱을 넘지 못한 가호자는 그대로 아르모체의 손아귀에 나포(拿捕)되었고… 본인이 내민 구원의 손길이 닿기도 전에 칠흑 같은 절망의 나락(奈落)으로 처박히고 말았소이다!

나는 내 두 눈으로 보았소. 수호자(守護者)가 처절한 단말마와 함께 심연의 구렁텅이로 빨려 들어가는 그 참담한 광경을!



이 참극에 앞서, 아르모체가 몰고 온 잔혹한 창풍(槍風)의 궤적 너머로 무참히 속박(束縛)당했던 점술사(아르카나)의 명줄을 비호(庇護)하기 위해, 수호자(守護者)는 이미 스스로의 영혼을 제물로 바쳐 그 고결(高潔)한 부활의 기회를 소진(消盡)해 버렸소. 전우를 구원하고 치렀던 의기(義氣)로운 피의 대가가, 기어이 이번 찰나에 가혹한 독(毒)이 되어 수호자의 발목을 묶어버렸소.




그리하여 본인은 기어이 고결한 수호자(守護者) 를 한 전장 속에서 두 번이나 참살(斬殺)하는 전대미문의 대역죄를 완성하고야 말았소이다.

토벌의 위업이 찬란히 빛나는 최후의 승전 전광판(MVP 창)이 떠오른 정숙한 찰나, 본인은 참으로 인면수심(人面獸心)의 사자후를 전장에 토해내고야 말았소.

​『 부디 이 미천한 자객과 백년가약(百年佳約)의 연을 맺어주시구려! 』

​그 망언을 허공에 아로새긴 채, 본인은 수호자의 경악 어린 일갈이 들려오기도 전에 비열하고도 신들린 축지(縮地)의 신법으로 파티창을 박차고 영영 자취를 감추어 버렸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