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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검은마법사는 대적자가 타나를 죽이지 않은 행동이 오롯이 대적자의 선택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대적자가 신의 힘과 지성체의 의지를 증명했다 믿고, 스스로 죽음을 택하였다.



 제른 다르모어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대적자 스스로의 의지였다기에는 아케인 리버 그 어디에서도 대적자는 스스로 깨달은 적이 없기 때문이다.

 대적자의 의지는 정말 존재했던 것인가. 대적자의 제른 다르모어가 준비한 무대, 세르니움에서 우리는 그 결과를 알 수 있었다.

 지금 말할 수 있는 것은, 세르니움과 그곳에서 살아가는 모든 생명들은 제른 다르모어가 데몬과 데미안, 그리고 검은마법사를 상징하는 모든 것들을 기만하기 위한 도구라는 점이다.


15. 신의 도시 세르니움: 믿음과 의지, 그리고 깨달음



 세르니움은 세계의 의지에 항전하던 마지막 고대신, 미트라의 도시이다. 이른바 성지 이곳저곳에 남겨진 부자연스러운 지형들은 이른바 "신의 도시"에 걸맞는 위용을 보여준다. 그러나 막상 세르니움의 상황은 어떠한가?

15.1. 세르니움: 찬란한 신의 도시 속 미숙한 생명들


 세르니움에는 세 개의 교단이 존재한다. 태양의 미트라, 새벽의 네로타, 불꽃의 스피사까지. 이들은 모두 같은 신의 다른 면모이지만 수백 년이 지나며 이들의 뿌리는 잊혀졌다. 각 교단의 신도들 간의 자잘한 다툼은 계속되고, 세르니움 왕가는 노쇠한 왕의 젊은 후계자와 미트라의 대신관 사이의 신경전이 벌어진다. 

 세르니움은 "신의 도시"에 걸맞는 위용을 보여주지만, 신의 도시에 살아가는 생명들은 전혀 신의 도시에 어울리지 않는다.


 검은 마법사는 "신의 도시"를 구현하면 자연스레 생명들의 고통은 사라질 것이라 생각했으나, 세르니움에 거주하는 생명들은 "신의 도시"의 주민들임에도 여전히 각자만의 불완전함을 갖고있다. 

 검은 마법사의 의지를 잇는 대적자가 세르니움에 들어선 순간, 제른 다르모어는 보여준다. 찬란한 신의 도시와 그곳에 살아가는 미숙한 생명들 간의 극명한 대비를 말이다.


 세르니움에 동행한 연합 측의 인물이 "이데아"라는 점도 의미심장하다. 분명 이데아는 검은마법사가 주장한 신의 도시에 가장 걸맞는 개념이 아니었던가.

 이러한 세르니움의 모습은 어째서 제른 다르모어라는 인물이 검은 마법사의 이상에 동의하지 않았는지에 대한 제른 다르모어 나름의 대답이자, 검은 마법사의 이상에 대한 기만인 셈이다.

15.2 천족: 과오 속에 던져진 믿음



천족은 태양신 미트라와 같이 강림한 종족으로, 비록 미트라는 봉인되었지만 하이마운틴에서 거주하는 천족들의 모습은 미트라의 권능을 보여주는 산증인이기도 하다. 하지만 신에 대한 견고한 믿음은 제른 다르모어의 첫번째 사도, 하보크에 의해 세 갈래로 나뉘게 된다.



 불신자 롤랜드와 광신도 기르모, 그리고 벌어진 과오 때문에 불신과 광신 그 어느 쪽도 선택하지 못한채 의심만을 갖게된 세렌이다.

 불신자 롤랜드는 신도들의 고통에도 응답하지 않는 태양에게 분노하여 신을 증오하지만 그의 상징인 흑태양을 보면 알 수 있듯, 태양에서 벗어나지는 못했다.

 광신도 기르모는 동쪽하늘을 불태우며 태양이 부활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 존재이지만, 신성검 아소르의 주인이 되기 위해서라면 천족들을 학살한 하보크와도 손을 잡는 등, 태양신의 응답따위는 신경쓰지 않고 자기 입맛대로 예언을 주무르려는 존재이다.


 세렌은 어느 쪽도 선택할 수 없다. 신을 부정하기에는 아소르 수송을 위해 죽어간 동족들에 대한 죄책감이, 신을 맹목적으로 믿기에는 동족들의 위기에도 응답하지 않은 태양신의 모습이 눈에 밟힌다.
 
 신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을 보이지도, 완전히 믿음을 버리지도 못하는 세렌은 깨달음을 얻고, 이 모든 과오를 극복할 수 있을 것인가.

 세르니움에서 대적자와 세렌은 교차하고, 제른 다르모어는 시련을 준비한다.

15.3 애런과 하보크: 믿음과 의지 그리고 힘.



제른 다르모어가 준비한 장치는 "신학자 애런"과 "파괴자 하보크"이다. 이 둘은 두 가지 의미를 지니는데 검은마법사에 대한 티배깅의 의미, 그리고 대적자와 세렌이 깨달을 수 있도록 메시지를 전하는 의미이다. 


애런은 직접적으로 검은 마법사의 실패를 알리는 역할을 함으로써 검은 마법사를 티배깅한다.

하보크는 조금 간접적으로 검은마법사를 티배깅하는 도구인데, 그것은 하보크가 지니는 상징에서 찾을 수 있다.

하보크를 상징하는 요소는 번개이며, 번개는 예로부터 하늘에서 내린다는 점에서 신의 권능으로 여겨졌다.


 즉, 제른 다르모어는 "제우스"를, 하보크는 제우스의 무기인 번개 "아스트라페(Astraphe)"를 상징한다 볼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이전 글에서 제우스를 상징하는 두 인물을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바로 데몬과 데미안이다. 데몬은 륀느를, 데미안은 알리샤를 제압함으로써 시간과 생명의 신인 크로노스를 몰아낸 제우스의 성질을 나눠 가진다고 적었었다.

 제른 다르모어는 제우스의 성질을 나눠가진 데몬과 데미안과는 다르게 자기 혼자만으로도 제우스를 오롯이 은유함으로써 이 둘을 능가하는 존재라 주장하는 것이다.

 
공교롭게도, 고대신 미트라의 모티프가 된 신 "미트라"는 원시 인도유럽어 명사 mitra-(계약, 약속)에서 따온 신명으로 "서약"과 "광명"의 신이다. 이 서약과 광명은 각각 데미안과 검은마법사가 연관되어있다.

미트라가 "서약"의 신이라는 점에서

"서약"의 신 티르의 오른팔을 대가로 묶어낸 펜리르를 떠올릴 수 있다. 펜리르는 이전 글에서 데미안을 상징하는 존재였다.

 
또, "광명"은 태양과 빛의 의미를 지니는데, 빛과 태양을 의미하는데, 우리는 여기에서

"빛"의 초월자이자 "검은 태양"을 상징하는 검은마법사를 연상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바라보면,  제른 다르모어가 하보크를 통해 미트라의 종복인 천족의 도시인 하이마운틴을 파괴한 사건은 데몬과 데미안을 능가한다 주장하는 존재인 제른 다르모어가 검은마법사를 연상케하는 미트라의 종복들을 멸망시킨 사건이라 볼 수 있다.

즉, 하보크는 데몬과 데미안, 그리고 검은마법사를 도매금으로 기만하는 장치이기도 하다.




 검은 마법사에 대한 티배깅적 요소는 차치하고서, 대적자와 세렌에게 준비한 장치로서만으로 바라보아도 이 둘은 훌륭한 장치이다.

 신학자 애런은 대적자와 세렌에게 지식을 전해주는 인물이다. 하지만 애런은 단편적인 진실들을 제시할 뿐, 그것들을 조합하여 깨달음을 얻을 수 있게끔 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즉 애런은 대적자와 세렌이 본질을 꿰뚫을 수 있게끔, 배경지식을 주기 위한 장치이다.


 하보크는 대적자와 세렌에게 주어진 시련으로, 대적자와 세렌이 빠른 시일내에 깨달음을 얻을 수 있도록 압박하는 역할을 한다.

 이렇듯 애런과 하보크는 대적자와 세렌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도록 하는데, 이 둘이 동시에 언급하는 단어가 있다.

 바로, 믿음과 의지이다. 믿음은 세렌을, 의지는 대적자를 의미한다.


 애런은 대적자에게 제른 다르모어와 맞서는 이유를 묻는 과정에서 의지를 언급하였고, 이는 보더리스에서 검은마법사가 언급한 지성체의 의지와 일맥상통한다.


 믿음은 세렌이 자신의 과오를 극복하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단어이자, 성유물을 작동하는데 필수조건인 염원을 의미한다. 즉, 보더리스에서 검은 마법사가 언급한 신의 힘(=혼돈, 세계의 의지를 거역하는 힘)을 의미한다.



 믿음과 의지의 의미를 인지했다면, 우리는 비로소 하보크의 발언이 가리키는 본질을 이해할 수 있다.

신의 힘과 지성체의 의지는 그에 걸맞는 강함이 있어야 비로소 의미있게 작용한다. 라는 것을 말이다.


에브릴은 대적자의 힘(=신의 힘)과 물리적 강함의 괴리를 언급했으나 그럼에도 대적자를 상대하기에는 에브릴이 약하다는 점을 깨닫지 못했고, 기르모는 신의 힘을 얻어 강함을 갖추기 전에 복수를 언급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소속과 이름을 밝히라는 칼라일의 말에대한 하보크의 대답에서도 우리는 제른 다르모어의 뜻을 알 수 있다.

본질을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레프군은 그야말로 머저리이고, 본질을 깨달을 수 있다면 그것이 어떠한 이름을 가지 중요치 않다는 뜻을 말이다.



여기서도 데몬의 본질을 보는 능력을 볼 수 있는데 칼라일은 하보크가 도시 전체에 번개를 떨어뜨린 것에 주목하는 반면, 데몬은 하보크의 정체가 순혈마족이라는 점을 바로 꿰뚫어 보는 것을 볼 수 있다.

참고로 하보크가 순혈마족이라는 점은 매우 중요한 정보임에도, 데몬 고유스크립트 이외에는 전혀 언급이 없다.

15.4. 시험의 결말: 무의미한 몸부림이 되어버린 영광 

이렇듯 제른 다르모어는 대적자와 세렌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도록 여러 단서를 던졌다. 자신의 정체를 알 수 있는 단서도 같이 던지면서 말이다.



날개를 잘리고 추방된 우든레프의 선례를 알고있었음에도, 잘라도 잘라도 다시 자라나는 자신의 날개를 언급하며 자신이 제른 다르모어 일수도 있다는 단서를 던졌고,



 미반납 도서의 회수를 대적자에게 부탁함으로써 미트라의 진실을 깨달을 수 있게끔하고 나아가 세렌이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도록 단서를 주었다.



하지만 대적자는 미트라의 진실만을 깨달았을뿐, 구원은 스스로의 손에 달렸다는 본질을 깨닫지는 못하였다.



결국 대적자와 세렌이 본질에 대한 깨달음을 얻지 못했기에, 애런은 이데아에게 팔마의 진정한 뜻을 알려줌으로써 세렌의 구원을 도왔다.


이 때, 애런이 이데아에게 진실을 알려준 이유는 "예언은 실현되는 것이 아니라 실현시키는 것"이라는 이데아의 발언이 "구원은 스스로의 손에 달렸다"는 본질과 일맥상통했기 때문인 것도 작용했으리라 생각한다.


제른 다르모어는 애런으로써 마지막으로 세렌에게 기회를 준다. 
하지만, 세렌은 아소르의 주인이 되어 세르니움을 구원했음에도 자신의 자격을 의심하며, 자신에게 믿음을 가지라는 이데아의 말을 실천하지 못했다.

세렌은 스스로를 구원하지 못했다.

제른 다르모어는 결론을 내렸다.



대적자는 지성체의 의지를 증명하지 못했다.



제른 다르모어의 손짓 한 번에 준비한 무대는 막을 내린다.

그나마 깨달음을 얻을 가능성을 보인 대적자와 세렌조차 결국에는 미숙한 생명일 뿐이다. 그들의 몸부림은 결국 무의미하게 될 것이다.

제른 다르모어는 이를 가여이 여길 뿐이다.

마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