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 아라토르 스토리를 통해서 와우 세계관의 빛이 정확히 어떤 성격을 갖고 있는지 제법 명확하게 정립된 거 같네요. 
관련 내용인 인게임에도 있지만 베타 시절 제가 번역해둔 게 역게에도 있으니 혹시 모르시면 참고하시면 되고요.
어쨌든 이 부분을 대충 넘겼거나 해서 이해하지 못했을 분들을 위해 좀 더 설명해 봅니다.


와우 세계관에서 빛은 그 자체로 선한 힘이 아닙니다. 빛은 그저 결국 본인의 의지를 강하게 해주는 증폭기에 가깝죠. 
와우 설정에서 빛에 대해 처음으로 정의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유명한 문구, '하나의 길' 또한 이런 관점에서 조금 더 세련되게 다듬어졌습니다. 


빛 그 자체가 하나의 길을 따르고 강요하는 게 아니라, 빛을 믿는 사람들 각각이 자신이 걷는 하나의 길을 점점 더 확고하게 따르게 된다는 의미가 되었죠. 
그래서 빛을 따르는 사람들 사이에도 의견 차이가 생기는 게 자연스러워졌고요.


그래서 빛은 본질적으로 위험성을 품고 있기도 합니다. 
처음에는 올곧고 정의로운 마음에서 시작했다 하더라도, 그에 대한 신념이 점점 더 커지고 몰두하다가 맹신, 광신으로 변질되어 폭주해 버릴 수 있다는 거죠. 
빛 자체가 악해서라기보다는, 빛에 대한 믿음이 너무 커졌기 때문에 자기 길이 무조건 맞다고 여기게 되고, 다른 길을 걷는 사람들을 문제시하기 시작하면서 위험해진다는 겁니다. 

그래서 빛을 잘 다루는 게 더욱 어려운 것이기도 하겠네요. 
자신이 옳은 일을 하고 있다는 확신이 없으면 빛의 힘이 약해지겠지만, 또 그 확신이 커지면 결국 자기도 악인이 되어버리기 쉬우니까요. 
와우역사적으로 벨렌, 티리온처럼 스스로에 대한 의심을 겪고 이겨낸 자들이 빛을 결국 더 잘 다루게 되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것도 절묘하게 맞아 떨어지는 설정이 아닌가 싶네요.


그리고 이번 한밤에서 굉장히 흥미로운 개념이 등장했는데, 그게 바로 빛만개 현상입니다. 
얼핏 보면 빛만개 현상은 지금껏 설명한 빛의 문제와는 결이 다른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한 가지 숨겨진 요소를 떠올려 내면 이 또한 놀라울 만큼 정확하게 설명됩니다.


위에서 설명했던 빛은 이성이 있는 존재들과 관련된 것이었습니다. 
이성이 있는 존재들이 각자의 신념, 정의관을 가지고 있고 빛이 그것들을 강화한 상황이었죠. 

하지만 빛만개의 영향을 받은 동식물, 특히 식물들에게는 그와 같은 복잡한 이성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 식물들은 그저 생존과 번식이라는 생물로서의 기본적이고 본능적인 욕구만을 갖고 있겠죠. 
즉, 이성이 발달하지 못한 생물들이 빛의 영향을 받게 되자, 생명이 가진 생존 의지가 급격하게 강화되고 과하게 표출되어 버린 게 빛만개 현상의 본질이란 겁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빛의 선봉대, 투랄리온 등이 보여준 문제점과 빛만개의 문제는 본질적으로 동일합니다. 
존재가 추구하는 하나의 길에 대한 의지, 신념, 집착을 빛이 과하게 강화하다가 악영향이 드러나기 시작한 거죠. 
그리고 빛은 그 존재가 추구하는 길에 따라 다양한 양상으로 드러나게 된다는 걸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고요.


어쨌든 이 모든 설정은 오리지널 와우에서 붉은십자군을 통해 보여준 빛의 문제점에서 시작됐을 건데, 이게 요즘 블리자드가 와우 스토리를 전개할 때 써먹는 방식인 거 같습니다. 
그걸 의도했든 아니든 간에, 먼 옛날 뿌려뒀던 작은 씨앗을 긴 시간이 지난 지금 수확해서 큰 스토리라인으로 써먹는 느낌이죠. 
물론 말가니스, 나스레짐의 설정을 이용해서 확장시킨 어둠땅처럼 설명이 빈약했던 때도 있긴 하지만, 거기서 깨달음을 얻은 건지 빛이나 질서를 빌런으로 내세우기 위해 현재 전개 중인 방식은 꽤 훌륭한 편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하란다르는 이 빛만개 현상과 이어진다는 점에서 한밤 레벨링 지역 중 굉장히 흥미로운 지역인 것 같습니다. 
사실 하란다르는 분명히 내부 전쟁 지역으로 설정되었다가 급하게 한밤으로 밀려난 지역이라는 것이 거의 확정적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서 흥미롭게도, 하란다르는 와우 스토리에서 보통 선하다고 여겨지는 세 지역의 문제점, 위험성, 악행을 모두 드러내는 지역이 되었죠.

아마 원래 하란다르는 티탄의 악행을 중심으로 다루는 지역이었을 겁니다. 
조용히 잠자며 자라나던 아제로스 세계혼을 납치해 세계핵에 가둬버리고, 그 과정에서 끔찍한 상처와 고통을 남겨 아제로스를 영원히 악몽에 시달리게 만들어 버린 것이죠.
이 정도만 해도 내부 전쟁에서 다루던 세계핵 스토리의 대단원으로는 충분히 잘 기능했을 겁니다.

근데 여기에 빛만개 현상이 추가되면서, 빛과 생명의 문제를 하란다르에 모두 담게 되었습니다.
빛만개 현상에서 빛의 문제를 위주로 얘기하긴 했지만, 사실 이건 생명의 문제와도 연결되어 있죠.
어쨌든 생명이 갖고 있는 성장 욕구, 즉 드군에서 드러났던 무분별한 영원성장의 위험성이 빛으로 인한 폭주와 결합되어 생겨난 현상이니까요.

어쨌든 한밤에서 공허 문제가 아마도 일단락되고 나면 이후엔 티탄이 유력하게 적으로 떠오를 거고, 이미 티탄이 악역으로 나올 개연성은 거의 다 세워진 것 같습니다.

하지만 빛과 생명의 위험성도 차근차근 빌드업하고 있는 듯하니, 마지막 티탄 이후에 이 둘이 바로 적으로 나와도 (특히 빛의 경우엔) 정말 이상하지 않을 것 같네요.
한 가지 좀 더 복잡한 가능성을 생각해 본다면, 어쩌면 아만툴도 빛의 영향을 받았던 것이라고 나올 수도 있을 것 같네요. 
질서에 대한 아만툴의 집착도 사실 빛의 영향으로 폭주한 상태였던 거다, 이렇게 나와도 이상하지 않으니까요.
그러면 또 자연스럽게 빛이 다음 빌런 세력으로 이어지기도 쉬울 것 같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