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로스트아크 세계관과 카멘을 바탕으로 한 비공식 2차 창작 소설입니다.

※ 개인적인 캐릭터 해석과 오리지널 캐릭터가 등장합니다.

※ 게임 내 1부 시나리오 이후를 바탕으로 상상한 이야기입니다.

※ 카멘 및 메인 스토리 관련 스포일러가 포함될 수 있습니다.

* 대표 이미지는 AI로 제작하였습니다.








23. 종말과 부활의 시



카멘은 우두커니 서 있을 뿐이었다.

카마인이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


“어차피 이렇게 될 운명이었다. 카멘. 너는 그저 스쳤을 뿐이야.”


카마인은 고개를 숙이고 눈을 감았다.


“그 운명을 비틀려고 온갖 것들이 몸부림쳤지. 그리고 대가를 치렀다. 하지만 우리라면…. 우리는 비틀고 부술 힘을 가질 수 있다. 카멘, 너 혼자서는 무리겠지만.”


이내 카마인은 한쪽 눈썹을 슬쩍 치켜뜨며 입꼬리를 씰룩거렸다.

그가 가증스러운 위로를 전하던, 쿡쿡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고 있던.

카멘은 상관없었다. 마침내 그가 입을 열었다.


“…나는….”


카멘이 슬쩍 고개를 돌렸을 때, 카마인의 손아귀가 그 얼굴을 움켜쥐었다.


“그만. 거기까지다. 카멘.”


이 이상, 혼돈의 방황을 좌시할 수 없었다.


카마인의 손이 투구를 움켜쥐듯 잡아 왔지만, 카멘은 저항하지 않았다.

그 손을 내칠 수도, 잘라버릴 수도, 혹은 되려 상대의 목을 조를 수도 있었다.

이 순간을 얼마든지 미룰 수도 있었다. 이제 카멘은 그러지 않았다.


어차피 맞이해야 할 순간이라면 지금 맞이하겠다.

작고 보잘것없더라도, 스스로가 만든 기준이 존재할 때.

심연의 군주가 남긴 망각의 저주에 지워지기 전에.

본능만 남은 짐승이 아닌, 존재 대 존재로서.

힘의 우열이 통하지 않는 전쟁.

자아와 의지의 싸움.

나는 나로남겠다.

그것이 최후가 될지라도.


고요한 동굴 안에서 날카로운 바람이 소용돌이쳤다.

내려놓은 어둠의 검이 들썩이고, 돌덩이가 휘날렸다.

탐욕스러운 손은 맹렬히 혼돈을 빨아들였다.


투구가 쩍쩍 갈라졌다. 떨어지는 금속은 바람에 휩쓸렸다.

검은 갑옷의 몸이 서서히 무너져 내렸다.

무릎이 내려앉아도 가져가는 자는 더욱 탐욕스럽게 움켜잡았다.


카마인은 이미 승리를 자신했다.

혼돈의 힘에 남은 카제로스의 저주는 지우면 그만이었다.

그는 웃었다.


“너는 사라져야 해. 카멘. 그게 맞아.”


가공스런 힘이 몰려들어 왔다.

폭발적이지만 고요하게.

나의 권능. 오래전 마땅히 가졌어야 했던 힘.

모두가 내 것이다.


그럼에도 투구 속의 금빛 눈동자는 흐트러지지 않았다.

아주 잠깐.

부서진 투구 아래, 그의 입가가 움직인 듯했다.

미소인지 아닌지 알 수 없는 미묘함.

‘뭐냐. 카멘…그것은.’

이제 부질없어질 존재에게 카마인은 족히 코웃음 칠 수 있었다.


투구가 깨졌다.

카마인의 푸른 손가락 사이로, 카멘의 창백한 얼굴이 드러났다.

은빛 머리카락이 세차게 휘날렸지만, 그의 고요한 표정은 흐트러지지 않았다.

단지 호박색 시선이 저편을 향하고 있을 뿐이었다.

방금 떠나간 생명이 머무는 그 흑단나무에.


카마인의 미간에 힘이 들어갔다.

그것은 루페온의 하찮고 쓸데없는 피조물이다.

이그하람이란 신이 탐욕을 모르진 않았다.

그것이 거슬릴수록 손을 더 세게 움켜쥐었다.


창백한 얼굴도 흐릿해져 간다.

세차게 휘날리는 은발도 사라져간다.

검푸른 연기 같은 형체만이 남았다.

이제 카멘이라고 부를 수도 없는 존재가 되었다.

그마저 집어삼켜 형체조차 흐릿해질 때까지도

‘그것’의 시선은 흑단나무에 머물렀다.


그리고 둘에서 하나만 남았을 때,

카마인은 혼돈의 신이 완성되었다고 생각했다.

이것이 카마인으로서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이제 이그하람이 시작된다.


동굴로 들어서던 루는 멈칫했다. 그 뒤로 모험가와 카단, 니나브와 실리안까지, 모두가 굳은 듯 멈춰 섰다. 그들의 눈앞에서 검은 형상의 누군가가 사라졌다. 그리고 하나만 남았다.

카마인이었던 것 같은 존재가.


바람이 멈췄다.

자색 공기가 온 세상을 물들였다.

그 공기 속에서 일렁이는 어둠이 남은 하나의 존재를 감쌌다.


루와 모험가, 모두의 시선에 불길한 예감이 감돌았다.

더 이상 카마인이 아닌 존재를 감싼 어둠이 맹렬히 요동쳤다.

모두의 불안 속에, 어두운 자색 연기가 세상 끝까지 뻗어가다 다시 안으로 응축했다. 온 세상을 물들인 자색 공기까지 동굴 안으로 빨려들었다. 그것은 동굴의 벽에 균열을 만들었다. 사방이 무너질 듯 금이 갔다.

어둠의 응축 속에 사람의 형상이 비쳤다.


카마인, 아니 이그하람은 환희에 찼다.

가공할 힘이 영겁의 시간을 넘어 돌아온다.

모든 것이 뒤집히고 흩어진다.

동굴이, 산이, 대지가.


이그하람의 형상은 다시 흩어져 천장을 뚫고 솟아올랐다.

모든 천장이 부서지고 동굴은 더 이상 동굴이 아니게 되었다. 부서진 잔해가 떠올랐다. 루와 모험가, 모두의 몸도 함께 떠올랐다. 그들은 지평선 끝까지 뒤덮은 검보라색 우주 속에서 거대한 무언가가 일어서는 것을 보았다.


그 존재의 붉고 긴 머리카락이 폭포처럼 흘러내렸다. 산과 강을 덮어버릴 듯한 붉은 머리카락이 다시 떠올랐다. 흩어진 머리칼이 푸른 피부를 치고 맹렬한 바람과 함께 휘날렸다. 그 속에서 달과 같은 눈동자를 빛내며 눈이 떠졌다.


세상을 감싼 진공이 모든 것을 들어 올리고 내리눌렀다. 요동치는 바람과 절대적 고요가 뒤섞였다. 바위가 뜨고 깃털은 꺼져갔다. 그 모든 흐트러짐 사이로 루와 모험가 일행은 휩쓸려 버렸다.

어디선가 황금 빛무리가 휘날렸다.


“그만하시오. 어버이여.”


에버그레이스였다.


“이 이상 아크라시아의 생명을 빼앗는다면 나는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오.”


지평선 너머의 존재가 그때야 고개를 돌렸다. 붉은 눈자위 속 금빛 눈동자가 루와 모험가의 일행을 보며 눈웃음지었다.


(그곳에 있었나.)


차분하면서도 천지가 울리는 목소리였다.

루와 모험가 일행의 뒤로 산보다 거대한 에버그레이스가 나타났지만, 지평선 너머의 존재에 비하면 작은 도마뱀과도 같았다.

혼돈이 말했다.


(걱정하지 마라. 에버그레이스. 나는 내 것을 찾을 뿐이니. 아직은.)


저 혼돈의 존재가 달만큼 거대한 금빛 눈동자를 굴렸다. 모험가와 눈이 마주쳤다.


(계승자. 네가 목도하라. 무엇이 남고, 무엇이 사라졌는가를. 언젠가 다시 만날 때까지.)


그 존재가 점점 사라져갔다.

아크라시아의 하늘을 뒤덮은 혼돈의 우주와 함께.


루와 모험가 일행은 다시 떨어져 내렸다. 에버그레이스가 그들의 추락을 막아주었다. 그들은 서서히 동굴이 있던 곳으로 내려왔다. 하지만 동굴은 물론 산이 통째로 사라졌다.


루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일대는 사방이 움푹 파여 거대한 구덩이가 되어 버렸다.


“사라졌구나. 모든 게….”


루의 안타까운 시선 끝에 하나 남은 것이 보였다.

어떻게, 이럴 수가.

그 혼돈 속에서도 살아남은 나무가 있었다. 은은하게 빛나는 나무가. 모험가와 에스더들도 나무를 보고 놀란 표정이 되었다.


루는 재빨리 달려가 보았다. 나무 아래 에보니가 있었다. 조금은 기대에 찼던 루의 표정이 점점 슬프게 변해갔다. 파리하게 식어버린 에보니의 얼굴에 더 이상 생명의 기운이 없었다. 루는 주저앉으며 고개를 숙였다. 푸른 눈망울에 눈물이 맺혔다.


“아아, 어찌 이런. 에보니. 얘야.”


상심한 루의 등을 니나브가 어루만져 주었다. 루는 슬픔 속에 또 다른 상실감을 느꼈다. 그런데 그것이 무언지 떠올릴 수가 없었다.


모두의 혼란 속에 모험가는 에버그레이스를 올려보았다. 모험가는 지금의 상황이 이해되지 않았다. 바위산으로 몸을 지탱하며 에버그레이스가 고개를 내밀었다.


“혼돈의 신이 부활하였다. 계승자여. 그가 무엇을 행할지는 그 누구도 예측할 수 없을 것이다. 절대자는 중용을 모른다. 우리는 그에 대비하여야 한다.”


모험가는 그가 카마인이냐고 물었다.


“그렇다. 이전에는 그랬지. 이제 그는 더 이상 카마인이 아니다. 혼돈의 신, 이그하람이다.”

그를 왜 어버이라 하였나?

“나는 빛과 혼돈의 힘으로 태어난 존재. 그렇기에 그는 내 어버이이기도 하다. 허나, 그가 아크라아의 균형에 해를 끼친다면 나는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모험가는 나무를 돌아보았다.


저 나무는 어떻게 된 건가?

“그것은 나도 모른다. 이그하람의 변덕인지. 어떤 의지가 남긴 것인지. 하지만….”


에버그레이스는 나무를 향해 조금 더 머리를 내밀었다. 루는 젖은 눈망울로 에버그레이스를 올려보았다.


“에버그레이스님.”


에버그레이스가 인자하게 웃었다.


“아직 그 영혼이 심연에 닿지 않았다면, 아이의 다른 심장으로 옮길 수는 있겠구나.”


그 말에 루의 푸른 눈이 의문으로 동그래졌다.


“그 아이의 가슴에 남은 조각말이다.”


에버그레이스의 말에 루의 표정이 점점 밝아졌다.


지난날, 에보니의 가슴에 남은 혼돈을 누군가가 빼내려 했지만 실패했다. 루의 표정에 의문이 남았다.

누구였지?


루가 의문을 풀지 못하고 있는 사이, 에버그레이스는 에보니의 영혼을 그러모아 구슬처럼 만들었다. 마치 가디언의 영혼처럼. 루의 눈앞에 작고 동그란 영혼이 반짝였다. 그것이 에보니의 가슴 속 남은 조각에 깃들었다.


모두의 시선이 에보니에게 향했다. 그 한가운데서 루는 간절한 표정으로 에보니를 내려다보았다. 기대의 눈빛 속에 에보니가 서서히 눈을 떴다. 루의 표정이 밝아졌다. 눈을 깜빡이던 에보가 루를 보고 옅게 미소 지었다. 그리고 두 팔을 내밀었다.


“누누.”

“에보니. 얘야. 정말 살아난 게냐? 다행이다. 다행이야.”


에보니는 루의 머리를 어루만지며 뺨을 비볐다. 잠깐의 이별, 그 사이 삶과 죽음이 교차했기에 이 재회가 더 각별했다. 어둑한 새벽을 밀어내고 동이 터 올랐다. 그럼에도 나무의 잎사귀는 여전히 빛났다. 그리고 이 나무를 지키던 누군가가 있었다.


세상엔 공포와 절망을 주었던 존재.

두렵고 무서웠지만,

묵묵하게 곁에서 안정감도 주었던 존재.

원망스럽고 증오스러운 운명을 넘어섰기에,

더없이 소중했던 시간을 함께한 존재.


에보니와 루는 함께 나무를 바라보았다.

둘만이 공유하는 기억과 감정을 남긴,

이제 세상에서 지워진 존재를 끝내 떠올리지 못한 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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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편은 토요일에 올라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