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6-05-10 12:33 | 조회: 31 |

11. 얼굴 없는 기억
아브렐슈드는 당황했다.
그가 저주에 대해 알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이름을 불러주는 일도 거의 없던 일이었다.
개안이 된 그녀의 눈동자가 카멘을 향했다.
“알고…있었나, 어떻게?”
“…….”
그는 더 답하지 않았다. 아브렐슈드는 대략 추측할 수 있었다.
아마도 그의 망각에 대해 알려준 자는 카마인이었을 것이다.
혼돈 신의 다른 반쪽.
그것이 카마인이었다는 사실은 두 존재가 안타레스 산맥에서 사라진 뒤에야 깨달았다. 카제로스가 소멸하고, 그림자들이 활개 치는 세상이 되어서도 하나가 되었을 혼돈의 신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 눈앞에 완성되지 못한 그가 있었다. 여전히 축복과 저주를 가진 채로.
아브렐슈드는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네게 망각을 전해준 나를 원망하지 않았나. 증오하지 않았나?”
그렇다고 하기엔 카멘은 너무 고요했다. 한숨의 터울을 두고 그가 되물었다.
“…그러길 바라는가?”
정말로 그랬다면 지금 이렇게 대화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녀가 이곳에 발을 들이기도 전에 검푸른 칼날에 죽음을 맞이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감정 없는 그의 얼굴을 보며 시선을 피한 건 아브렐슈드 쪽이었다.
“실은, 나도…이제야 나에 대해 알게 되었다. 전부라고 할 순 없지만. 적어도 공백이 있다는 것은 알게 되었지.”
“…….”
아브렐슈드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어쩌면 그 공백의 답이 네게 남아있을지도 모른다 생각했다.”
“…….”
아브렐슈드는 그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섰다.
“…네 모습에….”
후드 속 얼굴에 손을 올리려다 멈칫했다. 그가 피하진 않았지만 아슬한 간격을 두고 끝내 닿지는 못했다. 아브렐슈드는 손을 내리며 고개를 돌렸다.
“아무것도…떠오르지 않는군.”
그렇게 말하고는 카멘의 옆을 스쳐 걸어 나갔다.
그녀가 몇 걸음 옮겼을 때, 카멘이 물었다.
“이름도, 얼굴도 갖지 못했던 내게…이 모습을 준 건 너인가?”
아브렐슈드는 걸음을 멈췄다. 잠시 입술을 깨물다 낮은 목소리로 답했다.
“아마도.”
“…어떤 존재였나?”
“……?!”
아브렐슈드는 그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눈에 젖은 빛이 잦아들 때까지 침묵은 이어졌다. 아브렐슈드가 겨우 입을 열었다.
“모, 모르겠다. 나는 그저, 단지….”
단지 그리운 감정만 남은 누군가의 모습.
이름조차 모를 얼굴이 망각의 시간 속에서도 남아서, 카멘이라 명명된 존재에게 부여되었다. 하지만 그 얼굴은 오랜 세월 어둠의 주인이라는 투구 속에 가려져야 했다. 지금은 그가 얼굴을 드러냈지만 떠오르는 건 없었다. 아브렐슈드는 다시 갈 길로 돌아섰다.
또 잠시간의 침묵.
곧 뒤에서 그의 말이라곤 믿기 힘든 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엔 감사하지.”
아브렐슈드는 눈을 깜빡이며 시선 둘 곳을 찾았다. 가슴속에서 올라오는 것이 무언지 알 길도 없었다. 북받치는 그리움 한 칸에는 얼굴조차 갖지 못하고 헤매던 저 존재에 대한, 말 못할 감정도 자리했다.
모든 것들을 누르고 눌러 아브렐슈드는 형식적인 답을 전했다.
“처, 천만에.”
사과의 의미를 담은 말은 끝내 나오지 못한 채,
그녀는 보라색 빛기둥과 함께 사라졌다.
카멘은 그녀가 남긴 빛기둥의 잔상을 바라보다 이내 돌아섰다.
***
한편, 조금 전.
동굴로 가려던 소녀와 루는 풀숲 뒤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동굴 앞에서 웬 은발의 신비로운 여인이 아저씨와 무슨 대화를 하는 듯했다. 엿보려는 의도는 없었다. 그냥 분위기가 심각해 보여서 다가갈 수가 없었을 뿐.
“저 아줌마, 혹시 아저씨 애인이야?”
소녀가 입에 넣어주는 과자를 우물거리며 루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런 것 같진 않고. 저 여인은 설마.]
루의 걱정과 달리, 동굴 앞 심각한 분위기는 소녀의 상상력을 자극했다.
“어쩌면 저 아줌마는 베른의 공주님이 아니었을까? 아저씨가 기사일 때 사랑했던 연인인 거야.”
[뭐, 뭣? 그게 아니란다. 저 여인은 분명 몽환의….]
나서려는 루의 목을 끌어안으며 소녀는 동화 같은 상상을 펼쳤다.
“베른의 기사와 공주님이 사랑에 빠진 거야.”
루는 계속 동굴 쪽으로 시선을 고정했다. 베른에 공주가 있는지도 의문이지만, 분명 저 여인은 굉장히 위험한 인물이었다. 적어도 이전에는 그랬다.
“그런데 공주님은 다른 나라의 왕자님이랑 약혼을 하게 된 거지. 왕실의 일에 두 사람의 의견은 중요하지 않았을 거야.”
루는 묘하게 현실적인 내용이라고 생각했다. 그때 저 신비하고 위험한 여인이 카멘의 곁으로 다가가 얼굴을 향해 손을 올렸다.
“어어, 저거 봐. 사랑하는 사이 맞네. 그래서 둘은 함께 도망치기로 한 거야.”
소녀는 과자를 손바닥에 올려 나 한입, 염소 한입 먹이며 계속 떠들어댔다.
“그런데 아저씨를 짝사랑하는 못된 시녀가 공주님의 약혼자에게 일러바친 거야. 약혼자는 화를 내며 공주님의 나라와 전쟁을 하겠다고 선포하고. 예전에 베른에서도 전쟁이 났었잖아.”
물론 베른의 전쟁이 그 때문은 아니었지만, 저 두 존재가 그 전쟁 한복판에 있었던 것은 사실이었다. 루는 과자를 먹으며 얼토당토않은 이야기를 계속 들어야 했다. 소녀는 마을 언니들한테 듣던, 온갖 낭만적이고 자극적인 이야기를 총동원했다.
“평화를 위해 어쩔 수 없이 공주님은 약혼자와 결혼하기로 선언했어. 아저씨는 그 사정을 모르고 실망했던 거지. 그래서 베른을 떠난 거야.”
동굴 앞, 베른의 공주님은 차마 아저씨의 얼굴에 손을 대지 못하고 고개를 돌려 버렸다.
소녀의 이야기는 점점 장르가 바뀌기 시작했다.
“하지만 공주님은 아저씨를 잊지 못했어. 게다가 공주님의 뱃속엔 아저씨의 아기도 있었던 거야.”
[뭐? 그건 진도가 너무 빠른 것 같은데….]
소녀는 염소 친구의 귀에 대고 소곤거렸다.
“원래 많이 사랑하면 아기가 생긴댔어.”
[그래?]
동화는 이제 막장 로맨스가 되었다.
“공주님은 비밀을 감추고 결혼했어. 그런데 아기가 태어나서 커 갈수록 아저씨를 닮았던 거야. 나도 아빠를 많이 닮았거든. 어쨌든 공주님은 아저씨가 더욱 그리웠을 거야.”
[저런, 그건 좀 안타깝구나.]
“그래서 소문을 듣고 아저씨를 저렇게 찾아온 거야. 내가 친구들이랑 보육원 선생님들한테 아저씨에 대해 이야기하던 게 도움이 됐을까?”
루는 소녀의 손에 담긴 과자를 먹으며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동굴 앞, 베른의 공주님은 그리워하던 아저씨를 스쳐 지났다. 소녀는 입에 넣던 과자도 멈춘 채, 설명하기 바빴다.
“하지만 시간은 지났고 너무 늦어버렸지 뭐야.”
공주님은 차마 떠나지 못하고 다시 아저씨를 돌아보았다.
“그래도 미련은 남는다고 했어.”
루의 눈이 커지며 오물거리던 입도 멈췄다. 소녀는 미련의 의미를 몰랐지만 어쨌든 저런 상황엔 그런 게 있다고 한다.
소녀는 과자봉지를 움켜쥐었다.
“잡아. 아저씨. 잡아야지.”
[그러게. 어서 잡게나.]
“어서 손을 잡고 사랑의 맹세와 뽀뽀를….”
말을 하다 말고 소녀는 얼굴을 붉히며 키득거렸다.
소녀와 루의 응원에도 불구하고 베른의 공주님은 보랏빛 빛기둥과 함께 뿅 하고 사라졌다.
소녀는 마법의 퇴장을 보며 그녀가 진짜 베른의 공주님이라 확신했다. 이로써 페트라니아판 막장 로맨스도 끝이 났다. 이야기의 여운은 소녀와 루의 입가에 남은 뻥콘 부스러기가 되었다.
소녀는 어설픈 팔짱을 끼며 한숨을 쉬었다.
“후, 아저씨 바보. 공주님이 찾아왔는데. 뒤돌아보기까지 했는데. 저렇게 눈치가 없어서야.”
[그러게나 말이다. 좀 더 용기를 냈어야지.]
물론 진짜 공주님이거나, 기사님이더라도 문제가 많은 관계였지만,
소녀와 루에게는 별로 중요치 않았다.
소녀는 눈치가 없진 않았다. 오늘은 아저씨가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소녀는 열심히 그린 아저씨의 비뚤배뚤한 초상화는 다음에 보여주기로 했다.
“누누. 오늘은 말썽 피우면 안 돼. 아저씨가 힘들지도 몰라.”
루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밤, 루는 카멘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는 늘 그렇듯 어둠이 드리운 자리에 있었지만, 오늘은 왠지 더 깊이 가라앉아 보였다.
루는 괜스레 그에게 안부를 물었다.
[그대, 괜찮은가?]
유일하게 루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존재는 무심한 눈길조차 없었다.
얼굴조차 갖지 못했던 존재의 뒤늦은 자각은 그 밤, 더 깊은 침묵이 되었다.
=====
왠지 인게임내 동영상에선 카멘과 아브렐슈드 투샷이 많던데,
은근 잘 어울린다 생각했더랐죠.
그래서 지금 쓴 이 팬픽 내용이 아니면 아브렐슈드와의 로맨스를 망상했었습니다.
자식까지 낳았는데 그게 알고 보니 카단이 이었다거나, 아만이었다든가....
그 애를 온갖 음모 속에 과거로 보냈다든가...하는 개연성 밥말아 먹은 망상.
-
-
-
[팬픽션]종말의 시9
KYOh조회 162 추천 0
-
-
-
-
[팬픽션]종말의 시10
KYOh조회 95 추천 0
-
-
-
-
[팬픽션]종말의 시11
KYOh조회 32 추천 0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