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로스트아크 세계관과 카멘을 바탕으로 한 비공식 2차 창작 소설입니다.

※ 개인적인 캐릭터 해석과 오리지널 캐릭터가 등장합니다.

※ 게임 내 1부 시나리오 이후를 바탕으로 상상한 이야기입니다.

※ 카멘 및 메인 스토리 관련 스포일러가 포함될 수 있습니다.

* 대표 이미지는 AI로 제작하였습니다.







7. 씨앗 할머니



루는 괜스레 동굴 앞을 서성거렸다. 오늘도 소녀가 오지 않았다.

[벌써 사흘째인데.]

루는 소녀의 집으로 가보았다.

해가 질 무렵이었다. 

소녀는 항상 오전 중에 왔었고 이맘때쯤에 돌아갔다. 정원 구석에는 쓰러진 흑단 나무가 있었다. 루는 나무껍질에 머리를 긁어댔다. 요즘 통, 머리가 간지러웠다. 

그리곤 소녀의 집, 문 앞에 앉았다. 소녀는 오지 않았다.

루는 일어서서 암벽 사이의 길로 향했다. 귀가 쫑긋거렸다. 루는 몸을 돌려 비탈길로 달려갔다. 구부정하게 느릿느릿 올라오는 사람이 보였다. 소녀가 아니다. 루는 잠시 긴장했다.

한 손엔 지팡이를 들고 다른 손엔 봇짐을 든 노파였다. 노파가 루를 보고는 후덕한 미소를 지었다.


“네가 에보니가 말하던 그 아기염소로구나. 그런데, 너처럼 큰 새끼염소는 처음 보는데. 염소가 아닌 것도 같고. 사슴인가?”

[염소도, 사슴도 아니…아니, 그보다도 그 아이는?]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노파는 루를 스쳐 소녀의 집으로 향했다.

루는 노파의 행로를 멀뚱히 쳐다보았다.


“하긴, 그게 뭐가 중요하겠노. 그 아이의 친구라는 게 중요하지. 네가 많이 기다릴 거라 들었단다.”


루는 노파를 따라갔다.


[그 아이 소식은 모르는가?]


루의 의문과 상관없이 노파는 집 주변을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쓰러진 나무를 보고는 혀를 찼다.


“저런, 에보니의 어미가 정성스럽게 키우던 것인데 어쩌다 이리 되었누.”

[전쟁의 여파라더군. 아니, 그나저나 그 아이는 어떤 상태인가.]


새끼염소가 계속 울며 보채자 노파는 웃으며 원하는 답을 주었다.


“걱정 말거라. 그저 감기에 걸린 것뿐이니. 내일쯤이면 만날 수 있을 게야. 오늘 나를 따라오겠다는 걸 극구 말렸단다.”


루는 그제야 안도했다.


[다행이구나. 그 애의 몸속에 깃든 혼돈 때문에 조금은 불안했다.]


또, 이 노파의 정체도 알 것 같았다.

노파는 봇짐에서 주머니 하나를 꺼내 보였다.


“그래도 너에게 씨앗을 빨리 전해주면 좋겠다는구나. 아마 자기보다도 네가 더 기다릴 것 같다는데 사실이냐?”


소녀가 말하던 씨앗 할머니였다. 그런데 예상보다는 조금 일찍 온 듯했다.

노파는 루의 궁금증을 아는 것처럼 중얼거렸다.


“내게 남은 시간이 많지 않아 서둘러 왔단다. 이렇게나마 그 애의 작은 소원은 들어줄 수 있어 다행이구나.”

[고맙군, 인간.]


루는 노파가 내민 주머니를 입에 물었다.


“이렇게 찾아오는 것도 끝이 될 듯하니, 오늘은 이 집에서 쉬어야겠구나. 이번이 내 마지막 여행이 될 거란다.”

[그거 안타까운 일이로구나. 그 여생의 끝이 평온하길 바라네.]


루는 노파의 행동을 관찰했다. 분명 평범한 인간인데, 무언가 다른 기운이 느껴졌다.

노파는 쓰러진 나무 근처에 자리를 잡고는 모닥불을 지폈다. 어느새 세상은 어두워져 있었다.


“씨앗을 가져다주면서 이 집에서 하룻밤 묵곤 했었는데, 주인이 없으니 이렇게 야영을 할 거란다. 너도 오늘은 이곳에서 묵으련?”


루는 뒤를 돌아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덩굴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지만, 언제나처럼 동굴은 조용했다.

노파는 웃으며 루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듣던 대로 정말 똑똑한 아이로구나.”


노파는 큼직한 돌덩이 위에 앉았다. 루도 씨앗 주머니를 내려놓고 마주 앉았다. 

노파는 나뭇가지 몇 개를 불 속에 넣으며 계속 루에게 말을 건넸다.


“그래, 오늘 밤은 쓸쓸하지 않아 좋구나. 내 인생의 끝자락에 어린 친구의 부탁도 들어주고, 이런 귀여운 친구도 만나고, 또….”


노파가 말을 멈추며 시선을 옮겼다. 그녀가 바라본 곳은 루의 뒤였다. 루도 눈을 크게 뜨며 일어섰다.

후드 망토의 실루엣이 서 있었다.


[그, 그대는 언제 왔는가? 아니, 그보다도 왜?]


루의 당황과 달리 노파는 자글자글한 눈가에 미소를 띠었다.


“…그 애가 말한 동굴 속 인연을 보게 되는구려. 불이 필요하시다면…잠시 머무르다 가셔도 좋습니다.”


노파의 권유에도 그는 더 움직이진 않았다. 노파도 더 권하진 않았다. 노파는 나뭇가지 몇 개를 불 속에 넣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하실 말씀이 있는 듯합니다. 제가 영매나 마법사 같은 건 아니지만, 당신이 평범한 사람이 아니란 건 알겠군요.”

[노련한 인간이군. 그대가 다른 존재란 걸 알아보는 듯하니.]


루는 카멘을 돌아보았다.

그가 조용히 작은 바위로 이동해 앉았다. 그리곤 팔을 무릎 위에 걸치며 노파와 시선을 마주했다.

루는 잠시 긴장했지만, 그 모습을 보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노파는 손이 닿는 곳의 나뭇가지를 하나 꺾었다.


“이 나무는 이 집 아이가 태어나던 날, 그 애의 아비가 심었던 것이지요. 제가 이 나무의 묘목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쓰러져서 이렇게 썩어가니 이젠 땔감밖에 되지 않겠군요.”

“…….”

“그래도 이렇게 유용하게 쓰이니 이 또한 고마운 일이죠.”


노파의 이야기를 들으며 루는 엎드렸다. 많이 커졌다지만 이 어린 몸은 정말이지….

루는 소중한 씨앗 주머니를 끌어안고 잠들어버렸다.

카멘은 굳어 있던 입을 열었다.


“…네 안에 무언가가 있다. 하지만 이 순간은 인간, 너에게 묻는다.”

“제 안에 무엇이?…네 말씀하시지요.”

“너는 마지막을 말했다. 어째서…그렇게 초연할 수 있는가?”


노파는 잠시 생각하는 듯했다. 그것은 죽음에 관한 내용이란 걸 곧 깨달았다.


“그렇게 보였습니까?”

“…….”


카멘, 그가 보았던 대부분의 죽음은 비명과 공포, 그리고 절망이었다. 그의 앞에서라면 더더욱 그랬다. 그것은 인간은 물론 아크라시아의 모든 것, 페트라니아의 모든 것들이 그랬다.

잠시간의 침묵 끝에 노파가 지팡이로 쓰러진 나무를 가리켰다.


“남길 것이 있으니, 떠날 수도 있는 것 같습니다. 제가 나른 씨앗과 묘목들이 사방에 남았지요. 이 썩어가는 나무도 저보다는 오래 갈 것입니다.”

“…….”

“물론, 제가 갈 때는 아무것도 가져가지 못하겠지만요.”


노파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보며 작게 웃었다.


“저는 제 명만큼 살았습니다. 당신은 저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이 유구한 삶을 살았겠지요. 게다가 적수가 없을 만큼 강할 테고요. 그런데도 두려운 게 있으십니까?”


두려움.

건방진 말이었다. 하지만 카멘은 그 말을 부정할 수가 없었다.

저 노인은 이 잠깐의 시간 동안 모든 것을 간파했다. 그것이 저 노인의 지혜 덕분인지, 그 너머의 존재 덕분인지는 알 수 없었다. 

노파는 지팡이를 세워 몸을 기댔다.


“저는 세상 모든 것이 두려웠더랬지요. 악마, 인간, 짐승, 심지어 작은 벌레와 풀까지도…그 모든 것이 저를 위협하는 것들이었습니다. 때론 극복하고, 때론 그저 받아들였습니다. 운이 좋게도 지금까지 살아남았지요. 그랬습니다.”

“…….”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카멘은 또 다른 자신을 떠올렸다.

카마인.

힘을 잃은 신에게도 그 두려움이 있었을 것인가. 그도 저 유약한 인간들처럼 그것을 대면했을 것인가. 스스로 왜 이런 의문이 드는가, 알 수도 없었다.

카멘은 노파의 눈을 마주하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렇군. 이제…나와도 좋다.”


노파는 인자한 표정으로 의문을 띠었다.

모닥불의 불꽃이 느려졌다. 

노파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하며 맑은 눈이 영롱한 하늘빛으로 변해갔다.


“역시…알고 있었군. 나의 대적이자, 나의 형제.”


노파의 목소리도 변해있었다.


“…….”

“기억이 없더라도 내가 누구인지 너는 알 수 있을 거야. 축복받은, 또 저주받은 그 어둠의 권능에서 탄생한 너라면.”


태초의 빛.

그것이 태초의 어둠을 찾아왔다.


“…심연의 군주가 그리도 찾던 것이…너였군.”

“그래. 맞아.”

“…….”

“내 목적이 궁금하겠지. 어떻게 이곳에 나타났는지도.”


구부정한 노파는 자세를 바로잡으며 시선을 맞췄다.


“이건 내 의지의 일부일 뿐이야. 나는 속박되어 있어. 계승자가 새로 만들어낸 운명과 네가 가진 혼돈의 힘이 틈을 만들어주었지.”

“…….”

“혼돈의 힘이자 어둠의 주인. 너도 잘 알 거야. 언젠가 너는 혼돈의 신으로 돌아갈 거란 걸.”


카멘은 조금 더 가늘어진 시선으로 노파를 응시했다.

그의 시선에도 노파는 여전한 미소로 입을 열었다.


“나는 루페온의 질서에 속박되어 있어. 너 또한 이그하람의 혼돈에 묶여있지. 하지만 지금의 나는 선택할 수 없고, 너는 선택할 수 있어.”


카멘의 미간에 힘이 들어갔다.


“너도…나를 이용하고 싶은 건가?”

“그럴 수도. 한편으론 널 한번 만나보고 싶기도 했어. 계승자가 만들어갈 운명 밖에서 균형추가 되어줄지도 모르는 존재를.”

“…….”


노파의 표정이 조금 어둡게 변했다.


“우린 완전한 모습으로는 만날 수 없으니까. 만일 그렇게 된다면 모든 게 파멸할 거야. 오래전, 질서와 혼돈이 충돌했을 때처럼.”

“나는…모르는 일이다.”

“그럴 거야. 카마인은 알고 있지. 카마인, 이그하람의 의지는 내가 예측할 수 없는 존재야. 너도 그렇고. 하지만 네가 영겁을 살아온 신의 정신을 이길 수 없다는 건, 너도 잘 알 거야.”


카멘의 눈빛이 더 날카로워졌다.


“…그 말은 결국…내가 사라지고, 카마인이 이그하람으로 완성된다는 소리로군.”

“그래. 이건 인과로 예측한 게 아니야. 너희들은 혼돈의 존재이기도 하니까. 힘의 우열로 정해질 문제도 아니지. 단지, 의지의 문제일 뿐이야.”

“…….”

“이제 넌 그를 죽일 수도 없어. 그를 죽게 하지도 않겠지. 너 자신을 부정할 수도 없으니까.”


카멘은 잠시 시선을 달리했다. 

느릿한 불꽃이 천천히 휘날리다 사라져 간다.

노파의 형태 너머, 태초의 빛은 불꽃을 향해 손짓했다.


“그런데 네겐 뭔가 보이는 게 있어. 그것이 카제로스가 의도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어쩌면, 네가 혼돈의 힘에 뿌리내린 어둠의 의지이기 때문일지도 모르지.”

“…….”


불꽃이 노파의 손길을 따라 올라가다 다시 불 속으로 사라졌다.


“더욱이 너는 루페온의 운명에 영향을 받기 시작했어. 카마인은 그런 너를 용납하지 않을 거야.”

“…….”


거슬릴 법도 하건만, 카멘은 사라져버린 불꽃에 시선을 둔 채 부정하지도 않았다. 

또 한 번 노파의 손을 따라 붉은 불길 위로 파란 불꽃이 튀어 올랐다. 그것은 비현실적으로 느리게 떠오르다 다시 붉은 불 속으로 가라앉았다.


“너는 아직 이해할 수 없겠지만, 네가 여기에 있는 이상 네가 해왔던 모든 것들이 되돌아올 거야. 여기서는 그걸 업보라고도 하지.”

“나를…원망하는 건가? 아니면 떠나라고 하고 싶은 건가?”


노파 너머의 존재는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잠시 침묵했다.


“…둘 다 아니야.”


그리고 좀 전에 꺾은 나뭇가지를 천천히 내밀었다.


“이건 균형추를 싹틔울 아이에게 주는 선물이야. 전해줘. 그 아이도 좋아할 거야.”

“내게 뭘 원하는 거지?”

“이젠 내게 시간이 없어. 이건 선물이자 쐐기야. 쐐기가 된다면 네겐 족쇄가 될 수도 있어. 하지만 네가 선택해도 돼. 이것을 어떻게 할지.”

“…….”


부러뜨려 버릴 수도, 소녀에게 건네줄 수도.


곧 노파의 손이 떨어졌다. 나뭇가지가 떨어졌다. 그것을 상흔이 남아있는 손이 잡았다.

푸른 불씨를 머금은 불꽃이 다시 규칙에 맞게 타올랐다.

카멘은 손에 든 것을 내려보았다.

태초의 빛이 넘겨준 선물이자 쐐기.

무슨 의미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것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그뿐이었다.

그는 노파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노파는 앉은 채, 평온한 표정으로 숨을 거둔 뒤였다. 카멘은 일어서서 노파에게 다가갔다. 그가 푸석한 회색빛 머리에 손을 얹자 어둠의 기운이 노파를 감쌌다. 어둠은 노파를 분해하여 푸른빛과 함께 하늘로 피어올랐다. 

그것이 다 사라질 때까지 카멘은 자리에 서서 밤하늘을 올려보았다. 이곳의 하늘은 페트라니아와 달랐다. 알고 있던 것인데, 왜 이제야 달리 보이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어둠의 조문이 끝났다. 그는 잠든 가디언을 스쳐 조용한 걸음을 옮겨갔다.



해가 떴다.

루가 눈을 떴을 때는 카멘도, 노파도 자리에 없었다. 모닥불의 재만이 어젯밤의 흔적으로 남아있었다. 루는 씨앗 주머니를 물었다. 그것에 기대어 있던 나뭇가지가 흘러내렸다. 루는 씨앗 주머니를 내려놓고 나뭇가지를 바라보았다.

생명력이 넘쳐 보이는 묘목이었다.

루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익숙한 발걸음이 느껴졌다. 루는 비탈길로 향했다.


“누누!”


소녀가 발랄한 표정으로 손을 흔들며 달려오고 있었다. 루는 폴짝폴짝 뛰어가 소녀를 마중했다. 루는 씨앗 주머니를 물고, 소녀는 묘목을 들고 함께 웃으며 즐거워했다.


묘목이 된 나뭇가지가 풍성한 나무가 되길 기대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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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 묘사는 멋대로 상상한 해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