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 군도, 지금은 죽은 자들의 섬으로 알려진 그곳은 본래 지금의 데마시아나 녹서스와 견줄 만큼의 거대한 왕국이었다. 신의 은총을 받아 그 어떤 외세의 침략도 막아낼 수 있었으며, 밤에도 환한 빛으로 만연했고, 모든 이들이 굶주림 없이 행복했던 모든 이상의 왕국. 영원할 줄로만 알았던 그 왕국은 피의 군주가 왕좌에 앉음으로써 조금씩 뒤틀리기 시작해 애석하게도 스스로 자멸하고 말았다.

 

데마시아 중립 도서관 3단계 서고, ‘당신이 모르는 그림자 군도’ 129p 발췌.

 

이 이야기는 폭군으로 불리었던 피의 군주와 그의 기사에 관한 이야기다.

 

 

1.

 

폐하! 반란입니다! 지금 헤카림이 이끄는 군대가 이곳으로 오고 있습니다!”

 

간부들과의 유희를 즐기는 연회장으로 중갑을 걸친 대신이 뛰어 들어오며 소리쳤다. 모든 연회장의 시선들이 대신을 향했다. 아니, 애초부터 연회장에는 단 한사람만이 살아있을 뿐이었다.

 

, 페하.”

 

연회장에 난입한 신하는 자신의 말을 잊지 못했다. 신하는 자신의 발밑에 질척거리는 피의 강에 소스라치게 놀라며 뒤로 물러났다. 그의 왕은 연회장 한가운데에 무장을 한 체 여유로이 서있었다. 그리고 그런 그의 주위로 수십 명의 난도질된 시체가 산을 이뤘다. 모두 연회장에 초대된 왕국의 귀족들이었다.

 

, 대체 이것이.”

 

아 왔는가. 그대여, 내 전투참모장 그대를 잊고 있었구먼.”

 

전신에 피를 뒤집어쓴 황제가 말했다. 전투참모장은 대답하지 않았다. 허나 황제 또한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그의 붉은 눈동자는 두려움에 떠는 또 다른 먹잇감을 포착했을 뿐이었다.

 

황제는 신하를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먹잇감이 된 신하는 두려움에 떨려 뒷걸음질을 쳤지만 이내 밟히는 누군가의 잘린 팔을 밟으며 뒤로 쓰러졌다. 넘어진 그의 주위로 피비린내가 솟구쳤다. 그는 구역질이 났지만 이내 자신의 앞으로 다가온 황제의 모습에 아연실색했다.

 

, 대체 왜이러십니까 폐, 페하!”

 

이유라. 그런 건 없다. 그저 모든 것을 되돌리려는 것일 뿐.”

 

단호하게 말하며 황제는 칼을 신하의 복부로 내리꽂았다. 비명조차 제대로 지르지 못한 체 차가운 죽음을 맞이한 신하를 무감정한 표정으로 내려다보며 황제는 자신의 얼굴에 튄 핏방울을 닦아내었다. 황제는 비틀걸음으로 연회장을 빠져나갔다.

 

온몸에 피를 뒤집어쓴 황제는 미친 듯이 웃고 있었다.

 

 

2.

 

찬란하게 왕국을 비추던 햇빛이 먹구름에 가려 사라졌다. 수백, 수천의 말발굽이 생기를 잃은 대지를 울리며 거대한 흙먼지를 일으키고 있었다. 그들이 향하는 곳은 그들의 심장, 그들의 수도, 그들의 왕국이었다.

 

그들의 선봉엔 헤카림이 있었다. 그는 먹구름으로 둘러싸이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낮은 탄식을 내뱉었다. 어째서, 이렇게까지 어긋나 버렸단 말인가. 어째서, 이렇게까지 해야만 한단 말인가.

 

수도가 보입니다!”

 

헤카림의 잡상도 잠시, 이내 목표지가 보인다는 정찰병의 말에 헤카림의 다시 한 번 의지를 다지며 말고삐를 움켜쥐었다. 수평선의 너머로 빛을 잃은 황궁이 보이기 시작했다.

 

더 이상은 망설임은 없었다. 지금의 왕국은 잘못되었다. 이전의 찬란했던 빛은 그 빛을 잃었으며 백성들은 굶주리고 서로를 불신했다. 왕국엔 매일 같이 호화스런 연회가 열렸고, 저의 황제는 사람 죽이는 것을 유희로 즐겼다. 자신이 알고 있던 성왕은 이미 미쳐버렸다. 이대론 왕국은 자멸의 길을 걸을 것이고 백성들은 왕국을 잃은 체 고통 속에서 방랑할 것이다.

 

오늘, 이 지독한 연결고리를 제 손으로 끊도록 하겠습니다. 폐하.”

 

 

3.

 

황제는 고통어린 신음소리가 끊이질 않는 지하 감옥을 지나갔다. 곳곳에서 살려달라는 애원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으나 황제는 전혀 듣질 않았다. 황제가 원하는 것은 감옥의 가장 깊숙한 곳에 숨겨져 있었다.

 

황제의 발이 거대한 문 앞에 멈춰 섰다. 문은 마치 보물창고라도 되는 듯 화려한 보석들로 수놓아져 있었다. 문고리에 살짝 힘을 주자 육중한 철문이 소리도 없이 열렸다. 문 안에는 하나의 여인이 거대한 유리관 안에 떠있었다.

 

황제는 떨리는 손으로 유리관을 쓰다듬었다. 그의 손에서 묻어나온 피가 유리관을 적셨다. 황제는 붉은 눈으로 여인을 보았다. 여인은 눈을 감은 체 잠들어있었다. 너무나 생기 넘치는 그 모습에 황제는 아직도 그녀가 살아있는 것 같은 착각을 느꼈다. 그러나 언제나 그녀는 깨어나질 않았다.

 

오랜만이구나.”

 

황제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언제나 그녀를 보면 가슴이 떨리고 저렸다. 처음 만난 그때처럼. 그녀는 황제의 가슴 속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나의 사랑, 영원히 깨지 못할 나의 심장이여.”

 

여자는 대답이 없었다. 허나 황제역시 그녀의 대답을 기대하지 않았다.

 

이제 곧 내 친우가 온다고 하는구나. 너도 잘 아는 자다. 너는, 내가 어찌하였으면 좋겠느냐? 내가 어찌 그를 환영했으면 좋겠느냐? 내가 어찌 그를 마주하면 좋겠느냐?”

 

여전히 여자는 대답이 없었다. 그녀가 끝내 깨어나지 못한다는 사실이 가슴에 와 닿아 황제는 유리관 앞에 무릎을 꿇은 체 흐느꼈다.

 

난 왜 너를 끝내 가질 수 없는 것이냐.”

 

한참을 흐느끼던 황제가 말했다. 그는 피 묻은 검을 지팡이 삼아 몸을 일으켰다. 성 밖으로 거대한 함성소리와 함께 말발굽 소리가 들렸다.

 

그가 온 것이다.

 

슬픔에 젖어 있던 황제의 붉은 눈동자가 다시금 광기로 물들었다.

 

드디어 왔구나. 내 친우여!”

 

 

4.

 

헤카림은 고삐를 잡아당겨 말을 멈추었다. 그들의 앞에는 거대한 성벽이 그 위용을 드러내며 그들의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성 위를 지키는 병사는 없었다. 성문역시 굳게 닫혀있었다.

 

상대하지 않겠다는 건가?”

 

장군! 어떻게 할 것입니까?”

 

나오지 않겠다면 나오게 할 수밖에 없지. 투석기를 준비하라!”

 

그의 말을 이어 준비하라! 라는 외침이 진지 내를 가득 울렸다. 뒤에 대기 해놓았던 투석기들이 앞으로 다가오며 성벽을 부술 준비를 마쳤다. 헤카림은 손을 들어 공격 준비 신호를 보냈다. 발사준비! 라는 외침이 연이어 울려 퍼지며 바위를 실은 투석기의 줄이 팽팽해졌다. 이대로 헤카림이 손을 아래로 내리기만 한다면 수십 개의 바위들이 성벽을 무차별 적으로 깨부술 것이다.

 

그러나 헤카림은 손을 내리지 않았다. 성벽의 가장 높은 곳 성마루에 붉은 빛깔의 갑옷을 입고 그 모습을 드러낸 폭군이 있었기에.

 

피의 황제는 수천의 군세를 보고도 전혀 기가 죽지 않은 체로 성마루에서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니, 그는 오히려 수천의 군세를 벌레 보듯이 하고 있었다. 여유로이 그들을 둘러보는 황제의 모습에 헤카림은 미간을 찌푸렸다.

 

살인의 황제여! 피의 군주여! 얼룩진 영광이여!”

 

헤카림의 외침에 황제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투구에 가려 그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당장 투항하고 순순히 문을 연다면 특별히 그 목숨만은 살려 주겠소!”

 

여전히 황제의 군대는 보이지 않았다. 오직 성마루에 그 모습을 당당히 드러낸 황제만이 있을 뿐이었다. 그럼에도 황제는 여유로웠다.

 

헤카림은 혼란스러웠다. 대체 무엇이 그를 저리도 여유롭게 한다는 말인가. 수천의 군세 앞에서 조금의 기죽음 없이 어찌 저리 당당할 수 있단 말인가.

 

[지금부터 하찮은 버러지들에게 말하겠다.]

 

황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단조롭게 말하는 그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마법을 쓴 듯 모든 이들의 머릿속에 울렸다.

 

[투항하면 목숨만은 살려주겠다는 헛소리는 하지 않겠다. 네놈들이 항복을 하건 말건. 나는 네놈들의 벌레 같은 목숨을 살려줄 생각이 없으니,]

 

황제는 낮은 웃음소리가 모든 병사의 머릿속에 울렸다. 그는 진정으로 지금 상황을 즐기고 있었다.

 

[모두 어디 있는 힘껏 발버둥 쳐보도록, 이상이다.]

 

더 이상의 교섭은 없다는 단호한 선언, 황제의 말에 병사들의 표정에 투기가 어렸다. 더 이상 볼 것도 없었다. 헤카림은 치켜든 손을 아래로 내리며 공격을 선언했다.

 

투석기에 몸을 맡긴 바위들이 일제히 허공으로 솟았다. 수십의 바위들이 자신에게 날아오고 있는 와중에도 황제는 여유롭게 성마루에 떡하니 서있을 뿐이었다.

 

하늘로 치솟은 바위들이 일제히 쏟아져 내렸다. 황제는 자신이 들고 있는 검을 아래로 내리꽂았다. 검이 바닥에 박히며 불길한 보랏빛을 내기 시작했다. 먹구름을 뚫으며 하늘로 치솟는 보랏빛을 본 헤카림은 단박에 황제가 무슨 꿍꿍이를 벌인다는 것을 눈치 챘다. 그러나 그가 무슨 일을 벌이려 하던 그것은 이미 늦은 일이었다. 이미 수십 개의 바위들은 황제의 코앞에 와있었다.

 

굉음을 울리며 바위들이 부셔졌다. 부셔진 조각들이 흙먼지를 일으켰고 이내 황제와 성벽을 집어삼켰다. 병사들은 이것으로 전투가 끝났음을 직감했다. 오만한 황제는 돌무더기에 깔려 죽음을 맞이하였을 것이고, 왕국엔 평화가 찾아올 것이다.

 

그러나 헤카림의 생각은 달랐다.

 

[역시나 버러지들은 버러지일 뿐이로군. 그대들의 어리석음이 이젠 불쌍할 지경이야.]

 

머릿속을 울리는 황제의 웃음소리에 병사들이 웅성거렸다. 흙먼지가 사라진 성벽은 지나치게 멀쩡했다. 성마루에 서서 이 모든 광경을 지켜본 황제역시 먼지하나 묻지 않은 모습으로 거만하게 수천의 군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반입자 보호막이로군.”

 

성벽을 둘러싼 반투명한 막을 알아본 헤카림이 낮게 탄식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성벽에 보호막 기능이 있었다는 것은 황궁수비대장을 맡았던 그도 알지 못했었던 사실이었다.

 

그래봐야 방어의 기능일 뿐이다. 적은 오직 하나다! 모두 성문을 부셔라!”

 

헤카림의 외침에 웅성거리던 병사들은 이내 함성을 내지르며 성문으로 달려 나갔다. 수천의 말발굽이 먼지를 일으키며 성벽을 향해 돌격했다.

 

언제나 생각하는 거지만 헤카림, 네놈의 실력은 출중하지만 너무 무모하다는 게 문제야. 안타깝군.”

 

성벽으로 달려드는 수많은 군사들을 내려다보며 황제는 바닥에 박힌 검을 돌렸다. 돌연 철컥. 소리와 함께 성벽이 울렸다.

 

, 지진인가!”

 

모르겠습니다. 장군!”

 

저길 보십시오. 장군!”

 

병사하나가 가리키는 곳으로 시선을 옮긴 헤카림은 경악했다. 성벽이 갈라지며 그 속에서 족히 수십 미터는 되어 보이는 대형 골렘들이 천천히 걸어 나오고 있었다. 예상외의 복병에 병사들은 혼란에 빠져 우왕좌왕이었다.

 

. 제대로 진열도 갖추지 못한 병사들에게로 골렘의 거대한 발이 내리꽂혔다. 한 번에 수십의 병사가 골렘의 발아래에서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체 목숨을 잃었다.

 

, 저게 뭐야!”

 

으아악! 살려줘!”

 

그 크기에 억눌려 겁먹은 말들이 날뛰었고 병사들의 진열은 엉망진창으로 흐트러졌다. 골렘들은 그럼 병사들을 처참히 짓밟으며, 또는 손으로 휘저으며 너무도 쉽게 그들을 농락하고 있었다.

 

혼란의 중심 속에서 헤카림은 멍하니 전장을 둘러보았다. 어떤 이들은 골렘의 손아귀에 하늘로 내동댕이쳐졌다. 어떤 이들은 공포에 질려 도망치다 골렘의 발에 무참히 짓밟혔다. 어떤 이들은 골렘이 던진 바위덩이에 깔려 짓이겨졌다. 이미 이것은 전쟁이 아니었다. 이것은 그저 황제의 유희며, 학살일 뿐이었다.

 

헤카림은 이를 부득 갈았다. 손에 들린 언월도를 바로 잡으며 헤카림은 전장 속으로 말을 몰았다.

 

진열을 바로잡아라! 모두 나를 따르라! 물러서지 마라!”

 

함성소리와 함께 돌격하는 헤카림의 앞으로 골렘의 거대한 주먹이 날아왔다. 헤카림은 주먹을 피하지 않았다. 골렘의 주먹이 그대로 헤카림과 그의 애마를 휩쓸었다. 한 차례의 후폭풍이 휩쓸고, 골렘은 땅에 박힌 손을 빼냈다. 바닥에 거대한 구멍이 생겼지만 분명 짓이겨진 체로 있어야할 그의 시체는 없었다.

 

골렘이 목표물을 찾으려고 주위를 둘러보는 순간, 흙먼지를 가르며 골렘의 손을 타고 오르는 말과 기수가 있었다. 순식간에 골렘의 머리까지 치고 올라온 헤카림은 골렘이 체 반응하기도 전에 언월도를 들어 골렘의 눈을 꿰뚫었다.

 

. 거센 흙먼지를 일으키며 골렘 하나가 쓰러졌다. 그 소리에 잠시 모든 것이 멈추었다. 골렘들은 일제히 골렘을 쓰러뜨린 헤카림을 바라보았고, 병사들은 헤카림의 발아래에서 힘없이 작동을 멈춘 골렘을 보았다. 아직, 그들에게도 승산은 있었다.

 

장군님께서 골렘을 쓰러뜨리셨다! 모두 장군님을 따르라!”

 

와아아. 함성소리와 함께 어느덧 전열을 바로 갖춘 병사들이 다시 한 번 돌격했다. 골렘들은 다시 한 번 그 육중한 팔다리를 휘저으며 병사들을 학살하려 했지만 이미 사기를 다진 병사들에게 두려움은 없었다. 순식간에 몰아붙이는 수백 수천의 병사들에 의해 불리해진 것은 황제였다.

 

. . 연이어 쓰러지는 골렘들을 황제는 흥미로운 눈빛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바닥으로까지 치닫던 사기를 전장에 그 위용을 드러내는 것만으로도 다시 끌어올리는 능력이란, 보면 볼수록 헤카림 그는 흥미롭고도 재미있는 장수였다.

 

역시나, 넌 내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군. 헤카림.”

 

황제의 낮은 웃음소리는 점점 커져 이내 광기와 같이 전장에 울려 퍼졌다.

 

이런 꼭두각시들 사이에 숨지 말고 내 칼을 받아라! 황제!”

 

또 하나의 골렘을 쓰러뜨리며 헤카림이 외쳤다. 치열한 골렘과의 전투에 흙먼지가 전장을 가득 메웠다. 그 바람에 헤카림은 자신의 주위에 누가 있는지 알아볼 수 없게 되었다. 눈앞을 볼 수 없게 된 헤카림은 투구를 벗어던졌다. 그럼에도 짙게 전장을 뒤덮은 흙먼지는 가라앉을 생각을 않았다.

 

. 전장의 어딘가에서 굉음이 울려 퍼졌다. 굉음과 함께 휘몰아치는 모래폭풍 사이로 병사들의 비명소리가 울려 퍼졌다. 사방에서 짙게 피비린내가 솟구쳤다.

 

숨지 마라 황제! 당신이 그 위에서 계속 유희를 즐긴다면 내가 올라가 네 목을 가져갈 것이다!”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모래폭풍 안에서 헤카림은 성마루를 올려다보며 소리쳤다. 그가 이 도발을 듣고 내려올 것이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다만, 서로 죽고 죽이는 전장을 그저 유희거리로 생각하는 황제를 헤카림은 용납할 수 없을 뿐이었다.

 

. 바로 옆에서 내리꽂히는 골렘의 손아귀에 헤카림은 말에서 떨어졌다. 머리가 울리고 속이 울렸다. 그럼에도 헤카림은 다시 일어섰다. 그의 손에는 여전히 언월도가 들려있었다. 황제! 헤카림은 성마루를 올려다보며 분노에 겨워 소리쳤다. 짙게 시야를 가린 흙먼지 사이로 아무도 없는 성마루가 보였다.

 

나를 이리도 찾아주니 감격에 겨워 죽겠군.”

 

낮게 울리는 목소리에 헤카림은 뒤를 돌아보았다. 황제의 손이 선을 긋고, 이내 시야를 가득 메우는 선혈의 분수에 헤카림은 재빨리 뒤로 물러섰다. 허나 이미 황제의 검은 헤카림의 피를 가득 머금고 있었다. 헤카림은 자신의 허전한 왼손을 보았다. 그의 왼손은 깔끔하게 잘린 체 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헤카림은 이를 악물어 솟구치는 고통을 참아내었다.

 

, 참아내는 건가. 헤카림,”

 

. 흥미로운 목소리로 말하는 황제의 뒤로 굉음과 함께 흙먼지가 솟구쳤다. 헤카림은 황제를 노려보았다. 황제는 투구의 안에서 붉은 안광을 번뜩이며 자신에게 쏠린 적의를 받아쳤다.

 

당신도 이미 알고 있겠지. 이 전쟁은 당신과 내가 죽기 전까지 끝나지 않아

 

죽는 건 네놈뿐이다. 헤카림.”

 

피 묻은 대검을 갈무리하며 황제가 말했다. 붉은 안광을 번뜩이며 헤카림을 노려보는 황제의 눈빛은 광기, 그 자체였다.

 

헤카림은 자신의 언월도를 바로잡았다. 허전한 왼손에서 계속해서 피가 솟구쳤지만 그것을 막을 겨를은 없었다. 헤카림은 이번 결투가 마지막이 되리란 것을 스스로 짐작하고 있었다. 더 이상의 시간은 없었다.

 

. 헤카림의 뒤로 다시 한 번 흙먼지가 솟구쳤다.

 

그것을 신호로 황제와 헤카림은 서로의 무기를 서로에게 향한 체,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달려들었다. 황제의 대검이, 헤카림의 언월도가 허공에서 교차했다.

 

 

5.

 

전장의 돌풍이 가라앉은 폐허는 고요했다. 신의 가호를 받아 찬란하게 빛나던 대지는 솟구치는 선혈들로 인해 붉게 물들었고, 승리만을 약속했던 왕국은 역사의 재로 남아 처참히 무너졌다. 파멸만이 남은 전장에 살아남은 건 죽음의 냄새를 맡은 까마귀들뿐이었다.

 

황제는 먹구름으로 가득한 하늘을 초점 없는 눈으로 올려다보았다. 이미 그의 몸은 제 기능을 다한 체 피투성이가 되어 죽을 때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수십 수백의 시신들 뒤로 무너진 황궁이 보였다. 그녀가 사라졌을 때와 같은, 무척이나 허무한 결말이었다. 아아, 대체 나는 이제껏 무엇을 위해 여기까지 왔던가.

 

점점 생기를 잃어가는 황제의 눈에 주위를 둘러싸는 까마귀 때가 보였다. 그것들은 황제가 숨이 멎는 순간만을 기다리며 입맛을 다시고 있었다.

 

결국, 이렇게 가는군.’

 

허탈하게 웃은 황제는 다가올 마지막을 기다리며 눈을 감았다. 까마귀 울음소리가 사방을 울리며 시끄러운 날갯짓이 사방에서 들려왔다. 그리고 고요함이 찾아왔다. 어느새 황제의 곁을 지키던 까마귀들은 모두 사라지고 없었다.

 

이봐, 아직 더 살고 싶지 않아?”

 

자신에게 드리워지는 죽음만을 기다리던 황제는 불현듯 들려오는 낯선 목소리에 눈을 깜빡였다.

 

누구지?”

 

별거 아냐 그냥 지나가는 나그네라고 생각하면 되.”

 

호기심에 가득 찬 얼굴로 그를 내려다보는 파란 여자가 황제의 눈에 비춰졌다. 그녀의 모습은 흐려져 있어 잘 보이지 않았지만, 황제는 그녀를 알 것 같았다. 그녀에 대한 이야기는 예로부터 내려오던 전설과도 같았다.

 

푸른 마녀인가.”

 

어머? 나를 잘 아나봐?”

 

잘은 모른다. 그저 전해 내려오는 민담으로만 생각하고 있었을 뿐.”

 

으흥, 그래? 라며 익살스런 미소를 지어보이는 마녀의 모습에 황제는 씁쓸한 웃음을 내뱉었다.

 

나를. 비웃으려 왔는가. 내 친우를, 내 사람을, 내 왕국을 몰락시킨 나를?”

 

.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내가 당신에게 온 이유는 간단해, 방금 전에도 물었잖아? 더 살고 싶지 않냐고.”

 

마녀의 말에 초점 없는 황제의 눈에 이체가 돌았다. 설마 그럴 리는 없겠지만. 만약, 더 살 수 있다면 그녀를 다시 깨울 수도 있을지 모르는 일이었다. 다시 왕국을 세울 수도 있을지 모르는 일이었다. 다시, 모든 것을 바로잡을 수도 있을지 모르는 일이었다.

 

만일, 정말로 다시 살 수 있다면!

 

, 싶다.”

 

? 뭐라고? 잘 안 들리는데?”

 

살고, .”

 

에이, 좀 더 확실하게 말해봐. 그렇게 힘없이 말해서야 누가 알아듣겠어?”

 

황제는 이를 악물었다. 말을 듣질 않는 몸을 억지로 움직여 숨을 삼켰다. 그리고 있는 힘껏 내뱉었다.

 

나는, 살고 싶다! 그러니 부디 나를 살려다오!”

 

, 좋아. 본래도 그럴 생각이었으니까. 그럼 우선 거래에 앞서, 네 이름은 뭐야? 설마 널 다시 살리는 은인에게 이름 하나 정도도 안 가르쳐 주는 소인배는 아니겠지?”

 

이름은 없다.”

 

마녀의 말에 잠시 침묵을 고수하던 황제는 힘겹게 입을 열었다.

 

아무도. 내 이름을 불러주지 않았으니, 내 이름은 없다.”

 

. 그럼 내가 지어주지 뭐,”

 

황제의 말에 마녀는 실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너무나도 당연하고도 담담한 모습이었다.

 

모데카이저(Mordekaiser), 어때? 나쁘진 않지?”

 

, 살인의 황제라. 나쁘진 않군.”

 

점점 숨이 희미해져오는 것을 느끼며 황제는 피를 토해냈다. 이제 정말 그에게는 시간이 없었다. 마녀는 점차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황제를 흥미로운 눈빛으로 내려다보았다. 저를 올려다보며 마지막 희망을 빛내는 그 모습이 너무나 재미있어서 마녀는 짙은 미소를 머금었다.

 

마녀는 허공으로 손을 뻗었다. 그리곤 제자리에서 원을 그리며 돌렸다. 그녀의 손끝에 검은 빛이 맴돌았다.

 

좋아, 모데카이저, 계약은 완료되었어. 계약의 대가로 너의 영혼은 내가 잘 가져갈 테니 걱정하진 마.”

 

그게 무ㅅ….”

 

마녀의 장난스런 말에 항의를 내뱉으려던 황제는 끝내 말을 잊지 못했다. 피로 물든 땅에서 솟구쳐 오른 검은 가시들이 그의 몸을 사정없이 꿰뚫어 버렸기에. 축 늘어진 황제의 육신위로 검은 구체가 떠올랐다. 마녀의 푸른 손아귀가 검은 구체를 감싸 쥐었다. 이제 더 이상 이곳에 볼일은 없었다.

 

또 다시 고요함만을 남긴 전장을 벗어나며 푸른 마녀는 낮게 웃었다.

 

어디한번 날 다시 기쁘게 해봐, 살인의 황제여.”

 

 

6.

 

너와의 첫 만남은 상당히 어설프면서도 간결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처음 인사드리겠습니다. 앞으로 왕자님의 호위를 맡게 된 헤카림이라고 합니다.”

 

헤카림? 멋있는 이름인데? 너 내 친구해라.”

 

, 아니 되옵니다. 어찌 저 같은 천한 것과 왕자님이 친구를.”

 

자식이, 왕자가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할 것이지 말이 많아. 그럼 오늘부터 우린 친구인거다?”

 

, 그게 그러니까. 알겠습니다.”

 

친구사이에 어색하게 존댓말이 뭐냐? 어서 응, 이라고 해봐.”

 

, 하오나.”

 

어허, 어딜 감히 왕자가 명령하는데.”

 

, .”

 

살짝 붉어진 얼굴로 한 반말에 어쩔 줄 몰라 하던 그 순수한 얼굴이 맘에 들었다.

 

괜찮으십니까? 폐하, 아직 움직이지 마십시오. 상처가 심합니다.”

 

나는 괜찮으니 너무 걱정 말게나.”

 

어리석은 결정이셨습니다. 소신이 맞아야할 독화살을 폐하가 대신 맞다뇨? 대체 어찌하여 그리 무모한 짓을 하셨단 말입니까.”

 

가만히 두면 네가 맞았을 테니까

 

폐하, 저는 폐하의 신하이자, 폐하는 저의 주군이십니다. 주군을 위해 신하가 한몸 바치는 것은 당연한 일, 부디 다음부턴 그런 무모한 짓을 벌이지 마십시오.”

 

그건 싫어.”

 

폐하!”

 

네 말대로 너는 내 소중한 신하이다. 그리고 또 너는 내 소중한 친우이다. 그러니 더 이상 신하된 도리로 나에게 소중한 친우를 빼앗으라는 말은 하지 말게나, 헤카림.”

 

언제나 올곧은 길을 걸으면서도 항상 나에 대한 걱정을 끊지 않던 너의 모습이 맘에 들었다.

 

이거 봐봐, 예쁘지?”

 

드디어 그분께 고백하시는 겁니까?”

 

, 고백이라니! , 그녀와 난 단순한.”

 

, 단순한 친구사이시지요. 허나 곧 연인이 되실 사이 아니십니까? 그리고 그분은 곧 왕비마마가 되실 분이시고요.”

 

으윽, , 지금 짐을 놀리는 것이냐?”

 

설마요? 소신이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이 자식, 이젠 제법 농도 할 줄 알고 많이 컸는데? 이리와 이 자식아!”

 

언제 어디서나 편하게 대할 수 있고 편하게 기쁨을 나눌 수 있었던 네가 맘에 들었다.

 

언제나 나를 지켜주겠다 맹세하고, 언제나 나에게 올바른 길을 말해주고, 언제나 나를 지루하지 않게 해주었던 네가 맘에 들었다.

 

그런데 어째서, 우린 이런 결말을 맞이하게 된 것이냐?

 

 

7.

 

황량하게 남은 죽은 자들의 벌판에 지독하게 차가운 바람이 일었다. 모래바람에 반쯤 묻힌 붉은 갑옷과 푸른 갑옷은 이제는 그 기능을 잃어버린 체 생기를 잃은 대지에서 썩어가고 있었다. 피의 강이 흐르고 까마귀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아무도 없는 고요한 벌판에 피비린내가 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