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6.25 전쟁[편집]
1948년 워커는 일본의 점령군 임무를 수행 중이던 주일 미 제8군 사령관으로 부임했다. 워커는 주일 연합군 총사령관인 더글러스 맥아더 원수로부터 미 제8군을 전투 준비 상태로 회복시킬 것을 명령받았다.[1]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남침으로 한국에서 6.25 전쟁이 발발하고, 미군의 참전이 결정되자 미 제8군의 한국 파병이 시작되었다. 워커는 북한군을 공격하여 원래 위치인 38선 이북으로 되돌려 놓으라는 명령을 받고, 미 육군 제24보병사단을 오산 전투와 대전 전투에 투입하였으나 이내 자신의 임무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워커는 수비로 전환했으나 북한군의 강력한 공격으로 큰 손실을 입었고, 미 육군 제1기병사단과 제25보병사단을 추가로 투입했음에도 방어선을 형성할 수 없었다.

워커는 그의 참모진과 예하 지휘관들에게 "한 발도 물러서지 말 것"을 독려했다. 그렇다고 해서 강력한 북한군의 공격에 밀려 어쩔 수 없이 후퇴하는 것을 무리하게 막지도 않았다. 그는 현실적으로 유연하게 후퇴를 거듭하여, 마침내 낙동강에 방어선을 형성할 수 있었다. 워커는 좁아진 방어구역의 장점을 활용하여 수세적인 상황에서도 부분적인 공세를 펼쳤고, 북한군의 공격기세를 조금씩 꺾었다.

워커는 미군의 증원이 계속되자 하와이와 본토에서 파병된 미 육군 제27보병연대와 미 해병대 제1임시해병여단을 소방대 역할의 기동예비대로 활용하여 전선의 급한 불을 끄고 약한 틈새가 보이면 틈틈이 반격을 시도했다. 본토 증원군이 증가함에 따라 전투 우위가 유엔군으로 이동하여, 북한군은 점차 끔찍한 고통을 겪었고, 북한군의 공급선은 지속적으로 공중 폭격을 당했다. 남침을 주도했던 T-34 전차는 거의 전부가 파괴되었다.
3.3.1. New Korea Plan[편집]
6.25 전쟁 초기 한국군과 유엔군이 낙동강 전선에서 북한군에 고전하자, 미국 정부에서는 한국의 정부 요인 및 피난민을 합친 62만명의 인원을 배에 태워서 한반도 외부에 망명정부를 구성하는 계획이 있었다.

이 계획은 이른바 New Korea Plan으로 당시 미국 정부가 미8군사령관을 통해, 한국 육군참모총장에게 영천 방어선이 붕괴되면 이승만 대통령과 서사모아로 가서 망명정부를 구성할 것을 요청했다는 제안이 실제로 존재했다는 것.참조 항목 다만 이 사실과는 달리 말 그대로 한국의 정부 인사와 군 관계자들에게는 언급조차 하지 않았던 계획에 불과했다. 언급 및 검토되었다고 알려진 지역은 아래와 같다.
제주도: 국부천대와 비슷한 방식으로 망명정부를 수립하는 방안이었는데, 일단 제주도는 지리학적 특성상 식수 공급이 어렵고 척박하여 농업 등의 기초산업의 기반이 되기 어려웠기 때문에 실현 가능성이 낮은 제안이었다.

규슈 북서부: 일본 규슈 북서부 일대의 나가사키 등지도 검토되었으나, 일본 본토에 대한민국 망명정부를 세우기에는 양국간의 감정 문제가 아직 예민하던 시기였고, 그로 인해 파생될 수 있는 충돌 가능성이 높았다. 그리고 한국 망명정부는 한국전쟁과 무관하게 이미 일본에 머물던 한반도 출신의 재일조선인들을 망명정부의 일원으로 편입시켜 인적 자원을 확보하려고 할 텐데, 일본 정부 입장에서는 아무리 일본인과 차별 대우하던 재일조선인이라도 전후 일본 사회를 재건하는 데에 한 명이라도 아쉬운 마당에 귀한 노동력을 유출당하게 놔두지 않을 것이므로 이 점에서도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등 여러 문제가 예상되었다.

그러한 여러 문제들로 인해, 일본 본토로의 대한민국 망명정부 수립은 후대에 그 개연성을 따져보더라도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서사모아 제도 내 일부 도서(당시 뉴질랜드령): 기밀이 해제된 문서 상의 일정을 보면 국군 고위 장교 및 그 가족, 정부 인사 및 그 가족을 우선으로 하고 아직 전투력을 보전한 한국군 약 몇 개 사단을 주축으로 한 이주 계획이 포함되었다. 민간인은 서사모아에 정착하고, 군인들은 미군 지휘 체계에 통합한 다음 아시아 방위에 이용한다는 내용. 하지만 서사모아 정착도 말처럼 쉽지가 않은 게 한국 민간인을 수십만에서 많게는 100만 단위로 정착시키면 당연히 기존 원주민들은 밀려날 수밖에 없고 이후 양측의 마찰은 상당할 것이 분명하다.[2]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사모아 제도로의 망명은 보고서가 작성될 정도로 그나마의 자구책이었다. 그 정도로 암담하고 절망적인 전황이었다는 것. 하지만 어쨌거나 이 모든 것은 말 그대로 제안에 불과했다. 다만 만에 하나 낙동강 전선이 쓸려나갔으면 전쟁 당시 남한(오늘날의 대한민국)의 사람들은 정말 어디론가 가서 망명정부를 수립하거나, 최악의 경우 정부는커녕 국민들마저 각자도생으로 공산화된 한반도나 일본 열도 등지로 뿔뿔이 해체된 채, 러시아 제국과 에도 막부 두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근거지를 상실한 아이누족처럼 지금쯤 정체성이 사실상 멸족 수준에 이르렀을지도 모른다. [3] 그 당시의 전황 판단, 그리고 현재의 판단으로도 미루어 볼 때 낙동강 전선은 남한을 위해서 반드시 지켜냈어야 할 보루였음이 실로 명백하다. 밀려났더라면 현재의 한국은 존재할 수 없었다.

3.3.1.1. 맥아더는 남한을 포기하려 했다?[편집]
미국 정부의 입장에서 정말 낙동강이 쓸려나가면 남한 전국민을 집단 이주를 보내야 하는 건가 싶었던 그 당시에, 미국 정부는 한국전쟁 초기 유엔군의 전면 철수를 주장했다고 한다. 이 사실은 항목 맨 마지막 비문 내용에 다시 나온다.

당시 일본에 있던 맥아더 사령관도 남한을 포기하는 것을 고려했었다. 본국에서 준비한 'New Korea Plan'은 둘째치고 전면 철수가 거론되는 시점이었다. 파죽지세로 북한군에 거의 모든 지역을 점령당한 당시 상황에 비추어볼 때 객관적으로도 남한은 승산이 없어 보였다.

남한 사수가 힘들어지면 일시적으로 일본으로 패주한 후 재정비를 고려하거나 아니면 New Korea Plan처럼 서사모아로 가는 것을 머릿속에서 생각했을 것이다. 애초에 더글러스 맥아더가 사령관이면 이런 일련의 상황들을 모를 리가 없다.

그러니까 미국 정부는 전황이 어두워지니까 철수하자고 주장했다. 앞서 말한 대로 낙동강에서 밀리면 알지도 못하는 섬으로 남한의 국가수반 + 전국민이 이사를 가야 하는 마당이었다. 거기다 대고 "여기서 다 죽더라도 여기서 버텨보겠다."라고 말한 장군이 있었다.


3.3.2. 내가 여기서 죽더라도 끝까지 한국을 지키겠다[편집]

1950년 7월 26일 미 육군 제8군 사령관 워커 중장은 대구에 대한 북한군의 군사적인 압박이 증가하자 미 제8군 사령부의 부산 이전을 미 극동군사령부에 요청했다. 워커 중장은 단지 사령부만 이전하는 것이지 전투부대를 부산으로 철수시키겠다는 게 아니었다. 그럼에도 극동군사령부 참모장 에드워드 알몬드 육군 소장은 "미 제8군 사령부를 부산으로 옮긴다는 것은 군대의 사기를 떨어뜨릴 우려가 있으며, 미 제8군이 더 이상 한국에서 지탱을 못하고 철수를 개시할 수밖에 없다는 인상을 줄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하여 사령부 이전을 반대하였다.[4]

알몬드 소장은 워커 중장의 요청을 미 극동군사령관 겸 유엔군사령관, 맥아더 원수에게 보고하고, 맥아더 사령관의 한국 시찰을 건의했다. 맥아더 원수는 다음 날인 7월 27일 알몬드 소장을 비롯한 참모들을 대동하고 대구를 방문했다. 맥아더 원수는 대구에서 워커 중장에게 "미 제8군이 현 진지를 고수해야 된다"면서, "더 이상의 후퇴는 하지 말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맥아더 원수는 미 제8군 참모장교들에게 "한국에서 철수란 있을 수 없으며, 한국 전선에서 제2의 덩케르크가 재연되어서는 안 된다"고 역설하였다.[5]

이때 맥아더 원수는 1950년 6월말 한강방어선 시찰을 하고 나서 구상했던 인천상륙작전 계획을 완성해놨고, 미 육군부에 이미 보고까지 마친 상태였다. 인천상륙작전 계획의 전제조건으로 달려 있던 게 바로 낙동강 방어선의 유지였기 때문에, 낙동강 방어선 사수는 맥아더에게 절대 양보할 수 없는 것이었다.
"Stand or die." 자리를 지키거나 죽어라.

"우리는 시간과 싸우고 있다. 더 이상의 후퇴, 철수, 방어선 재조정은 없을 것이다. 우리가 더 이상 퇴각할 곳은 없다...
덩케르크나 바탄같은 일은 더 이상 있어서는 안된다. 부산으로의 후퇴는 역사에 남을 학살이 될 것이다. 우리는 끝까지 싸워야 한다...
우리는 함께 싸울 것이다. 만약 우리 중 일부가 반드시 죽어야 된다면 우리는 모두 함께 싸우다 죽을 것이다...
나는 우리가 이 방어선을 지킬 것이라는 것을 모두가 이해했으면 한다. 우리는 승리할 것이다."

We are fighting a battle against time. There will be no more retreating, withdrawal or readjustment of the lines or any other term you choose. There is no line behind us to which we can retreat.…There will be no Dunkirk, there will be no Bataan. A retreat to Pusan would be one of the greatest butcheries in history. We must fight until the end.…We will fight as a team. If some of us must die, we will die fighting together.…I want everybody to understand we are going to hold this line. We are going to win.
1950년 7월 29일 예하 사단에 대한 8군 사령부의 명령서. (출처: http://www.historynet.com, 연합뉴스)


맥아더에게 사령부 이전을 요청했다가 거절 당한 그는 할 수 없이 “부산으로 밀리면 대살육이 일어난다. 오직 버티느냐 죽느냐(stand or die)의 선택밖에 없다”며 장병들을 독려했다.

문제는 좁디좁은 낙동강 전선에서도 전개한 유엔군의 병력은 턱없이 모자랐던 것이다. 말 그대로 버티기도 어려울 정도로 얇은 선을 그은 건데, 결국 부대 전체가 일종의 소방대처럼 한쪽의 위기가 발생하면 다른 쪽의 병력을 빼서 그쪽을 틀어막는 전략이었다. 그것도 방호산 소장이 지휘하던 북한군 6사단이 마산 쪽으로 측면 기습을 시도하는 바람에 이 전략도 무너질 뻔했다.


3.3.3. 월튼 워커의 결단[편집]
워커 중장은 무자비한 명령을 했다는 이유로 미국 의회에서 "미국 국민이 아닌 사람들을 지켜주기 위해 미국 장병들의 희생을 강요하는 게 마땅한가?" 라거나 "버티지 못하면 죽어라? 조국도 아니고 다른 전선에서 이러는 건 마치 일본 군국주의자들이 하던 명령과 차이가 뭔가?"와 같은[6] 많은 비난을 감수해야만 했다. 그나마 맥아더 장군은 "군국주의? 뭘 모른다. 워커의 말은 역사상 위대한 장군이 국가를 위해 내리던 명령일 뿐이다. 그런 것에 민주주의를 따지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라며 그를 두둔해 주며, 군사적인 책임을 함께 담당했다.

워커 중장은 Stand or die란 발언 덕에 본국 의회에서 논란을 일으켜서 한참을 욕 먹어가면서도 한국을 꼭 지켜야 된다고 전쟁을 반쯤 포기한 미국 정부를 설득하고 다녔다.[7]

워커 중장은 최전선에서 방어에 힘썼고 한국군과 미군 병사들이 모두 미숙한 훈련병들 위주였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낙동강 방어에 성공하였다. 그리고 맥아더 원수의 인천 상륙 작전이 성공할 때까지 시간을 버는 데에 성공하여 방어선을 굳혔다.

맥아더의 극동 사령부는 맥아더 패밀리만으로 구성되는 폐쇄적 조직이었다. 맥아더의 참모들은 맥아더가 태평양 지역 사령관으로 있을 때부터 함께한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한마디로 인맥 위주로 굴러가는 또 다른 작은 사회였던 셈. 맥아더는 당시의 고생으로 인해 상대적으로 사정이 나았다고 평가되던 유럽 전선 출신 장교들에 대해서 악감정을 가지고 있었는데, 유감스럽게도 월튼 워커는 출신 성분이 유럽전선이었다.[8]


게다가 무뚝뚝한 성격 탓에 같은 유럽전선 출신이면서도 여러 처세술을 통해서 맥아더의 신임을 얻은 10군단장 에드워드 알몬드 소장과 달리 워커 중장은 맥아더의 입장에서 볼 때 자신과 다른 '유럽전선의 장군'이라고 생각했다.

이것이 극명하게 드러난 부분이 바로 낙동강 방어전인데, 맥아더는 어떻게든 미 본토의 합참을 구워삶아 다수의 병력을 지원받았으나, 이들 대부분을 인천상륙작전 병력으로 전용했고 연이은 소모전으로 방어선에 구멍이 나고 있는 워커에게는 병력 지원을 하지 않았다.

워커의 입장에서는 서러운 상황이었다. 병력지원은 안 해주고 방어선은 틀어막으라고 명령을 했으니 워커 입장에서는 한국인에 대한 사랑보다 곧 전역해야 할 장성으로써 자신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오기로라도 임무를 완수해야 할 상황이었다. 더욱이 그냥 밀리기만 하면 또 모르겠는데 실제로는 이미 인천상륙작전이 계획되고 병력이 충원되는 마당으로, 상륙작전까지 버티지 못하고 전선이 붕괴되면 모든 책임은 자신이 뒤집어 쓸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당시 일화를 보면 그의 휘하 부대 연대장들 상당수는 무능하고 보신주의에 빠져서 전선이 붕괴되는 것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고, 워커는 직접 연락기를 타고 북한군 머리 위까지 날며[9] 전황을 체크하고 연대 지휘소를 찾아 다니며 휘하 연대장들을 닦달해 전선을 틀어막아야 할 판이었다.

그렇게 워커는 낙동강 전선을 지켰고, 그 와중에 상륙작전에 쓰려고 병력을 안주는 극동사령부의 사람들도 설득했다. 아무런 지원 없이 방어선 붕괴 직전의 절망적인 상황을 오기로 견뎌내 북한군의 주력을 낙동강에 묶어놓았고, 이는 인천 일대 방비에 공백을 야기하여 후에 있을 인천 상륙 작전의 발판을 만들었다.[10]


3.3.4. 북진에서의 패착과 무질서한 후퇴 (The Big Bug-Out)[편집]
인천 상륙 작전 이후 파죽지세로 북진하던 국군과 유엔군은 9월 28일 수도 서울 수복에 이어, 10월 19일 북한의 수도인 평양에 입성하였고, 청천강 유역까지 진격하면서 북한군을 매섭게 추격하였다. 하지만 맥아더 장군 및 유엔군사령부는 중공군의 개입 정황을 무시했고, 1950년 11월 말, 청천강 전투에서 중공군에게 대패하며 밀려나기 시작했다.

북진 실패의 제1책임은 중공군의 개입 징후를 멋대로 무시하고 적절한 방어선을 형성하지 않은 채 북진만을 재촉하던 맥아더에게 있으나, 워커 역시 이후 철수 과정에서 심각한 오판을 많이 저질렀다. 청천강 전투에서 전투력이 가장 떨어지던 국군을 낭림 산맥 가까이에 배치하여 중공군의 기습에 무력하게 당한 것도 있으나, 워커 장군 최악의 판단은 단연 평양 철수를 비롯한 38선으로의 무리한 후퇴와 이북 영토의 포기였다.

북위 40도 부근에서 벌어진 청천강 전투의 패배에도 여전히 평양은 60~70km 아래에 있었고, 전투 현장에서 38선은 170~180km나 아래에 있었다. 그러나 워커 장군은 평안남도-황해도에 이르는 거대한 지역에서 단 한번도 방어전을 수행하지 않고 힘들게 얻은 이북 영토를 중공군에게 쉽사리 넘겨주었다.[11]

이후 1951년 초에는 국군/유엔군과 북한군/중공군은 삼팔선 부근의 수십 km를 두고 어마어마한 공방전을 벌였고, 1951년 7월 정전협정의 시작 이후에는 겨우 수 km 단위의 고지전이 이어졌음을 감안하면, 평안남도와 황해도 일대를 너무 쉽게 포기한 워커의 판단이 무척 아쉬울 따름이다.[12] 평양을 비롯한 평안남도 일대는 청천강에서 너무 가깝기에 어디서 있을지 모를 중공군의 기습에 대비해 철수했다는 측면에서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청천강에서 멀찍이 떨어진 황해도조차 방어전을 한번도 시도하지 않고 너무 쉽사리 포기한 워커의 판단은 대한민국 입장에서 두고두고 아쉬운 결정이었고 미국의 군사사학계에서도 1950년 말 워커의 행보와 관련해서는 비판이 많다.[13]


3.3.5. 안타까운 사고[편집]
북진에서의 실패로 인해 유엔군이 38선까지 재퇴각하던 1950년 12월 23일 오전 10시경 워커 장군 일행이 탑승한 두 대의 지프차가 의정부 근처 미 제9군단 예하 24사단 전투지휘소를 향해 이동 중이었다.[14] 한국 경기도 양주군 노해면 도봉리 3구 외곽의 도로[15]에서 한국군 육군 제6사단 2연대 수송부 정비대 수리공인 민간고용인 박경래(당시 27세, 무면허)가 수리를 마친 차량의 시험주행을 위해 도로가에 나란히 주차되어 있던 5대의 차량 중 4번째 차량인 닷지 WC-51 쓰리쿼터(3/4 톤) 트럭을 출발시키는 도중 마주오던 워커 중장이 탑승한 차량의 측면을 들이받아 지프가 균형을 잃고 전복되었다. 당시 이 지프 차량에는 워커 중장 본인과 부관 레이튼 타이너; Layton C. Tyner 중령, 운전담당 부사관 조지 벨튼 상사; M/Sgt George A. Belton, 경호관 프랜시스 리난 병장; Sgt. Francis D.Reenan 총 4명이 타고 있었다. 워커 중장은 지프의 앞유리창을 깨고 차량 밖으로 튕겨나가 땅바닥에 부딪히면서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즉사한 뒤였다.[16]

당시 교통사고를 조사한 미군에서는 과실치사로 수사를 종료하고 한국군에 사건을 이첩하였는데, 이승만 대통령이 해당 사건 피의자인 한국군 소속 민간인을 사형에 처하려 하자, 당시 미 군사고문단의 제임스 하우스만 대위가 말렸다고 한다. 사고 유발 운전자는 과실치사로 3년 징역형을 받았다. 사고 직후 워커 중장의 시신은 미국으로 운구되어 1계급 추서 후 알링턴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프랭크 W. 밀번이 권한대행으로 제8군을 임시지휘했다.

당시는 안전벨트의 중요성은커녕 필요성도 잘 인식되기 전의 시대라서 전선에서의 비포장도로 위의 차량 운행 시 이러한 차량 사고가 매우 빈번하게 일어났다.[17]

우연찮게도,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워커 본인의 상관이던 조지 S. 패튼도 비슷하게 사고사를 당했다. 다만 패튼의 경우는 하드탑인 캐딜락이었는데, 뒷좌석 쪽의 칸막이 유리에 충격하며 목이 부러졌으나 즉사하지 않고 며칠 살아있다가 결국 사망한 반면, 워커는 당일 즉사했다.

여담으로 북한에선 자신들이 워커를 매복해서 사살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가령 2016년 7월 17일자 조선중앙통신 기사 "미국은 조선전쟁에서 당한 참패의 교훈을 잊지 말아야 한다"에서는 "미제8군사령관이었던 워커는 인민군 적후부대의 매복에 걸려 황천객이 되고 말았다."고 했으며, 2022년 7월 21일자 조선중앙통신 기사 "비참한 운명을 면치 못한 살인《장군》들"에서는 "모조리 죽이는 전법으로 승진의 길을 닦아온 미8군사령관 워커도 인민군대의 매복에 걸려 저승길로 갔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북한의 선전자료들마다 디테일이 계속 다르며 미군의 1차 사고 조사 보고서와 비교해 보면 터무니없는 황당한 소설에 불과하다. 애초에 사고 지역만 봐도 알겠지만, 이미 인민군은 한참 패퇴하고 박멸되어 수도권역에는 매복기습할만한 병력 자체가 남아있지 않은 상황이었다.[18]


진정한 히어로셨음.. 우리나라에선. 하지만 차사고로 ㅜㅜ

난 이분의 무공에 정말로 고마움을 느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