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즈의 질문에 도란은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필시 흩어진 힘을 하나로 모으기 위해 연합단체를 만들었을 것이고, 모두의 존경을 받는 영웅을 단체의 수장으로 앉혔을 것일세.”
 “과연 도란이로군!”


 라이즈는 크게 감탄했다. 도란의 예측은 하나도 틀림이 없었다. 라이즈의 시선은 다시 오반을 향했고 그는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현 영웅들 중 가장 큰 존경을 받고 있는 수호기사 ‘타릭’님을 초대 전쟁학회 마스터로 추대했습니다. 타릭님은 수십 년에 걸쳐 그림자 제국의 언데드들과 싸워 오셨고, 현 데마시아 왕국의 황실과도 깊은 유대관계를 맺고 있으니 실로 적임자라 할 수 있죠.”

 “오, 그렇군. 그 분이라면 지금의 혼란을 충분히 잠재우고도 남으실 분이지. 훌륭한 분을 선택했군!”


 도란이 크게 기뻐했다.
 

 하지만 그와 반대로 라이즈의 표정은 그리 밝지만은 못했다.


 “처음에는 혼란이 수습될 줄 알았네. 발로란 대륙 동쪽에서 한 인물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라이즈는 깊은 한숨을 내쉬더니 도란에게 물었다.


 “자네 혹시 파괴왕 ‘보람다크월’이라는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파괴왕 보람다크월!”


 도란이 크게 놀랐다.


 도란뿐만이 아니었다. 오반은 물론이고, 좀처럼 표정의 변화가 없던 마스터 이 또한 놀란 기색이었다.


 보람다크월은 백여 년 전의 영웅계에서 이름을 날린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미 오래전에 사망했다. 그런데 느닷없이 라이즈의 입에서 그 이름이 나왔으니 세 사람은 놀라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


 “혹시 그가 다시 부활이라도 했는가?”
 “시신은 발견되지 않았지만 그는 분명히 죽었네.”
 

 도란이 당황해하자 라이즈가 진정시키는 말투로 대답했다.


 “단지 파괴왕을 흉내 내는 자가 출현한 것일세. 그의 이름은 ‘다리우스’이고, 나름대로 명예를 지키는 일에만 힘을 사용했던 보람다크윌과는 달리, 그는 미치광이처럼 미쳐 날뛰고 있는 인물일세.”
 “그런 자가 있었단 말인가...”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그의 힘은 과거 보람다크월을 뛰어넘고 있다는 점일세. 그는 도끼하나로 눈 깜짝할 사이에 녹서스를 포함한 발로란 대륙 동쪽일대의 길드과 클랜들의 세력을 흡수하고 장악해버렸네. 
 “그런 일이...!”


 라이즈의 말에 도란과 오반 그리고 마스터 이는 또 한 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라이즈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다리우스의 도끼날은 타릭님이 이끄는 전쟁학회를 향했고, 어느새 ‘휘돌이 강’을 사이에 두고 두 개의 길드연합으로 나뉘어져 버렸네.”
 “그런 상황이라면 언제든지 큰 충돌이 일어나겠군.”


 오반의 독백이었다.
 
 라이즈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몇 번의 작은 충돌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더 큰 충돌이 머지않아 일어날 것입니다. 다리우스의 명을 받은 녹서스의 영웅들이 이미 움직이기 시작했으니까요.”
 “.....”

 “그렇게 된다면 그 피해는 엄청날 것입니다. 그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전쟁학회를 무너트리려 하고 있습니다.”
 “허나, 전쟁학회에서 그들을 지켜보고만 있지는 않을 텐데?”

도란이 굳은 얼굴로 물었다.
 
 라이즈가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답했다.


 “그들은 여러 곳에 흩어져서 이동하고 있다네. 전쟁학회에선 이미 그들을 막기 위해 힘을 쓰고는 있지만 모두를 제거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더군.”


 잠시 긴 침묵이 흘렀다.


 침묵을 깨트린 건 오반의 우울한 독백이었다.


 “발로란의 상황이 그러하다니...”
 “지금부터 이 라이즈가 하는 말을 모두 잘 들어주십시오.”


 라이즈의 표정이 비장하게 바뀌었다.


 “불멸의 요새의 세력은 어쩌면 상상을 초월할지도 모릅니다. 물론 전쟁학회는 전쟁을 제어하는 역할을 다 할 것이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많은 영웅들이 더 필요합니다.”


 세 사람을 차례로 응시하며 라이즈는 힘 있게 말을 이어 나갔다.


 “바로 여러분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


 오반의 눈동자가 요동치듯 흔들렸다.


 그것은 도란과 마스터 이 또한 마찬가지였다.


 “저 역시 마법사로서 이번에 전쟁학회에 가입하려 합니다. 촌장님께서도 저와 뜻을 같이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오반이 차분한 말투로 대답했다.


 “오늘 이 자리에서 그런 엄청난 제의를 받게 될 줄은 상상조차 못했구려.”


 아이오니아섬은 라이즈가 나타나기 전만 해도 대륙에서 일어나는 변화와는 전혀 무관한 평화로운 섬이었다. 지난 백 년 동안 외부세계에 대해 관심을 끊어 오지 않았던가.


 라이즈의 제안은 오반 혼자서 결정을 내리기가 어려웠다. 이는 아이오니아의 운명을 좌지우지 하는 선택이기 때문이었다.


 “만약 촌장님께서 생각할 시간이 더 필요하시다면 우선 도란이라도 데려가겠습니다. 허락해주십시오.”


 도란은 굳게 입을 다문 채 찻잔을 만지작거렸다.


 오반은 천천히 시선을 돌리며 도란과 라이즈를 번갈아 응시했다.


 “그는 우리와 같은 원숭이 일족이 아닐뿐더러, 언제든지 가고 싶은 곳은 스스로 갈 수 있는 자유의 몸이오.”


 그 말에 라이즈는 강렬한 시선을 도란에게 보냈다.


 “이제 자네의 선택만이 남았군.”


 도란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난 자네처럼 마법에 소질이 없는 그저 평범한 사람에 불과하네. 내가 나선다고 전쟁학회에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한심한 소리!”


 라이지가 언성을 높였다.


 “자네는 이 전쟁이 검과 마법만으로 승패가 결정된다고 생각하는 건가? 자네 같은 사람이 책략가가 되어준다면 큰 힘이 될 걸세!”
 “하하하하! 이보게 라이즈. 나는 그럴 능력이 되지 못하네.”


 도란이 크게 웃었다.
 

 라이즈는 결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 전쟁은  힘 싸움 이전에 전쟁학회와 불멸의 요새간의 두뇌 싸움일세!”
 “자네는 날 지나칠 정도로 높게 평가하고 있군.”


 도란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난 가지 않을 것일세. 발로란 대륙에도 유능한 인재들이 많이 있을 터인데, 지식학회 안에서만 해도 뛰어난 학자들이 많이 있지 않은가? 난 이곳 아이오니아에서 평생 약초나 연구하면서 살아갈 생각이네.”


 라이즈는 입을 굳게 다문 채 도란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어떻게든 그를 설득시키기 위해 머리를 굴렸지만 그의 뜻은 너무나 확고해 보였다.


 ‘헛수고 한 것인가!’


 그토록 패기가 넘치던 도란의 모습은 이미 이십 년 전에 사라졌다.


 ‘내가 유일하게 인정했던 도란이 일개 약초꾼이 되어버리다니...!’


 이십 년의 세월은 길었다. 도란은 모습뿐만 아니라 생각 또한 너무나 변해 있었다.
 

 지금의 도란은 평범한 사람에 불과했다.
 

 라이즈는 결국,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 * *



 달빛이 부서져 내리는 밤.


 오공은 깊은 생각에 잠긴 채 모래사장을 걷고 있었다.


 그는 라이즈에 대해 생각했다. 이상하게 여겨질 정도로 라이즈의 모습과 자신의 눈앞에 펼쳐졌던 그의 마법은 오공의 뇌리에 강하게 새겨져 있었다.


 라이즈를 생각하다보니, 소녀의 얼굴도 함께 떠올랐다.


 그녀의 귀여운 얼굴을 생각하다보면 지금도 심장이 두근거렸다.


 이곳 아이오니아에도 여자들은 많지만 그녀들은 모두 오공과 같은 원숭이였다. 그는 인간 여자의 모습을 처음 본 것이었다.


 그리고 이곳의 여자들은 어부들을 도와 거친 일들을 하고 있기 때문에 몸을 가꿀 여유도 없었고, 섬을 내리쬐는 뜨거운 태양빛에 항상 피부가 검게 그을려 있었다.


 하지만 인간 소녀는 달랐다.


 소녀의 보랏빛 피부 결은 무척이나 투명했다.


 연한 살결은 조금만 힘을 줘도 부서질 듯싶었다.


 ‘하루 종일 그녀 생각뿐이로구나.’


 오공은 생각을 떨쳐버리기 위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백사장을 거닐고 있던 그는 바닷물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차가운 바닷물이 무릎까지 차오르자 그는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잡념들을 떨쳐버리기 위해 어깨에 메고 있던 쇠봉을 꺼내 들어 우주류 봉술을 수련하기 시작했다.  


 부웅!


 은은한 달빛. 봉이 원호를 그릴 때 마다 물보라가 튀어 올랐다. 시간이 흐를수록 오공의 몸은 땀과 바닷물로 적셔졌다. 몸은 지쳐갔지만 강렬한 눈빛만큼은 사라지지 않았다.


 바로 그때.


 “호호호! 뛰어난 봉술이지만 봉의 주인의 실력은 형편없구나!”


 어디선가 비웃음이 들려왔다.


 오공의 시선이 빠르게 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낮에 보았던 소녀가 어둠속에서 천천히 걸어 나오고 있었다.


 오공은 아무런 말도 없이 그녀를 응시했다.


 달빛아래 비치는 소녀의 모습은 무척이나 아름다워 보였다.


 그녀는 낯선 섬의 환경에 익숙하지 못해 잠을 이루지 못하다가, 깊은 밤바다를 구경하기 위해 모래사장으로 나왔다. 그리고 우연히 오공이 수련하는 모습을 발견했던 것이다.


 소녀는 그런 오공을 비웃기는 했지만 그의 봉술실력은 상당한 수준임을 느꼈다.


 하지만 그런 느낌이 들면 들수록 낮에 당했던 수모가 생생하게 되새겨졌다. 소녀의 승부욕이 일순간 꿈틀거렸다.


 침묵하던 오공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너의 말대로 이 봉술은 내가 감당하기 어려운건 사실이지.”
 “알긴 아는구나.”
 “물론 그동안 수련을 게을리 했던 나의 책임도 있고...”


 오공은 처량한 표정을 지으며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예상치 못한 오공의 대답에 소녀는 어리둥절한 기색을 보였다.


 오공은 하늘에 떠있는 달을 바라보며 천천히 중얼거렸다.


 “난 멍청한 원숭이야... 멍청한 원숭이...”


 소녀의 불타올랐던 승부욕이 점점 꺼져갔다.


 “이봐. 난 그 정도까지 깎아내리려고 한 말은 아니야. 그저...”
 “날 위로해주려거든 이름 정도는 알려주는 것이 어때?”


 오공의 말에 소녀는 잠시 망설이나 싶더니 입을 열었다.


 “나의 이름은 ‘레이나’야.”


 레이나가 자신의 이름을 밝히자 오공이 씨익 웃었다.


 “이제보니 멍청한 원숭이에게 망신당한 사람의 이름이 레이나였군.”
 “....!”


 레이나는 비로소 자신이 오공에게 농락당한 것을 깨달았다. 그녀의 표정이 삽시간에 일그러졌다.


 “지금 이 자리에서 네놈을 베어버리겠어!”


 레이나는 허리에 차고 있던 숏소드를 뽑아들었다. 그리고 무서운 기세로 달려들며 검을 휘둘렀다.


 그러나 이미 그녀를 상대해 본 경험이 있는 오공은 여유 있게 공격을 피했다. 게다가 지금은 라이즈도 없으니 그녀를 제압할 절호의 기회인 것이다.


 챙!


 검과 쇠봉의 부딪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녀의 검술에 맞선 오공의 봉술은 한수 위긴 했지만 방심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우주류 봉술을 연습하느라 체력이 많이 떨어져 있었던 상태인지라 마나를 집중할 여력이 없었던 것이다.


 오공의 몸 상태를 눈치 챈 레이나는 코웃음을 날리며 더욱 매섭게 오공을 몰아붙였다.


 “흥! 멍청한 원숭이의 버르장머리를 단단히 고쳐주겠다!”


 오공은 계속 수세에 몰리자 당황하기 시작했다.


 ‘여기서 지면 망신이다!’


 오공은 젖 먹던 힘까지 끌어 모아 레이나의 공격을 막아냈다.


 그녀는 자신이 유리한 위치를 선점했음에도 그를 쉽게 쓰러뜨리지 못하자, 화가 치밀어 오를 지경이었다.


 그녀의 두 눈은 매서운 살기로 가득했다.


 “언제까지 버티는지 두고 보겠다!”


 그녀는 정신을 검으로 집중했다. 검날 주변으로 푸른빛이 감돌기 시작했다.


 오공은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깨달았다.


 그녀의 공격은 전과는 다른 상상을 초월하는 위력이었다.


 오공은 알지 못했다.


 그녀의 검에는 룬문자가 새겨져 있었고, 마나를 이용해 룬의 힘을 끌어내며 자신을 상대하고 있었음을.


 오공의 몰골은 점점 처참해졌다. 눈 깜짝 할 새에 옷 여기저기가 찢어졌고 살결에는 피가 맺혀 흘러나왔다.


 “지금이라도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어라! 호호호호!”


 레이나는 비웃음을 터트렸다.


 “평생을 섬에 쳐 박힌 네가 룬 마법의 힘을 알 리가 없지! 버티면 버틸수록 손해일 것이다!”


 오공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걸 보며 레이나는 통쾌해 했다.


 오공은 다시 한 번 힘을 끌어 모았다.


 그는 이를 악물고 우주류 봉술을 시전하기 시작했다.


 “지금부터 시작이야!”
 “흥! 그런 맥 빠진 봉술로 뭘 어쩌겠다는 거냐?”


 레이나가 또다시 비웃음을 터트렸다.


 자신만만했던 레이나였다. 하지만 오공이 우주류 봉술을 시전한 후부터 그녀의 자신감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평소 봉술 자체를 검술 아래로 보고 있었다. 하지만 직접 상대를 하고 보니 전혀 그러지 않은 것이었다.


 오공의 몸동작은 섬세하면서도 커졌다. 그의 쇠봉은 그녀의 검세를 사정없이 흩트리며 파고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