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라던 바다!”

 

오공이 크게 외치며 빠른 기세로 라이즈를 공격했다. 그러나 그는 이내 뭔가 잘못됐다는 것을 깨달았다. 라이즈의 몸놀림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빨랐다. 마치 공간을 왜곡하는 유령과도 같았다.

 

하지만 라이즈는 몸을 피하기만 할 뿐, 반격하지 않았다.

 

오공의 등줄기에는 어느새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이건 권법으로 어찌해볼 수준이 아니다!’

 

그는 지체 없이 어깨에 메고 있던 쇠봉을 꺼내들고 우주류 봉술을 시전하기 시작했다.

 

부우웅!

 

봉을 휘두를 때 마다 매서운 회오리가 라이즈를 에워쌌다.

   

 

라이즈는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참으로 훌륭하군요. 아이오니아의 무술 수준은 지금의 우주류 길드를 능가한다고 들었는데 헛소문이 아니었나봅니다!”

 

피우웅!

 

갑자기 라이즈의 양 손이 푸른색으로 물들기 시작하더니 반격을 시작했다. 그의 손에서 뿜어져 나온 십여 개의 구체가 허공을 수놓더니 오공을 향해 빠른 속도로 발사되었다.

 

‘저건 뭐야?!’

 

오공은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을 느꼈다.

 

기괴 무쌍한 라이즈의 마법 공격은 오공으로 써는 막아낼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위기의 순간, 검은 그림자 하나가 섬광처럼 나타나더니 구체를 튕겨내었다.

 

튕겨져 나간 구체들이 방향을 꺾어 라이즈를 향해 돌진했다. 깜짝 놀란 그는 뒤로 물러서며 구체들을 이리저리 피해나갔다.

 

오공은 그제야 자신을 구해준 인물이 누군지 알게 되었다.

 

“사부님!”

 

그 인물은 다름 아닌 마스터 이었다.

 

투구에 가려 그의 표정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분명 매서운 눈빛으로 라이즈를 노려보고 있었다.

 

“너희들은 누구냐?!”

 

라이즈가 마스터 이의 모습을 찬찬히 살펴보더니 이내 밝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혹시 그대는 마스터 이?”

 

마스터 이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라이즈는 껄껄 웃으며 말을 이었다.

 

“나는 이십 년 전 지식학회에서 도란과 같이 고대마법에 대해 연구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도란으로부터 당신의 이름은 귀가 따가울 정도로 들었었죠. 동작을 생각하기만 해도 현실에서 그대로 재현해 내는 우주 검사 마스터 이!”

 

마스터 이의 표정에는 전혀 변화가 없었다. 그는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도란에게서 지식학회에서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때 그는 단 두 사람의 이름만 말해주었다.”

 

라이즈가 빙그레 웃었다.

 

“혹, 그 두 사람의 이름이 피어스와, 라이즈 라는 이름이 아니었습니까?”

 

마스터 이의 눈동자가 일순간 흔들렸다. 비로소 중년 남자의 신분을 짐작한 것이었다.

 

‘이 자가 바로 도란이 그토록 칭찬했던 룬 마법사 라이즈로군!’

 

마스터 이는 도란이 세상에서 가장 똑똑한 사람이라 믿어왔다.

 

발로란의 모든 학자와 마법사들이 꿈에도 그리는 학문의 성지, 지식학회! 학회에서 존경을 받는 학회장은 ‘피어스’라는 늙은 학자였다.

   

 

그리고 피어스가 앞으로 지식학회를 이끌어갈 두 명의 후계자들 지목했으니, 그 두 사람이 바로 도란과 라이즈였다.

 

마스터 이는 좀처럼 남을 칭찬하지 않는 도란이 라이즈의 천재성을 이야기 할 때 별로 귀를 기울여 듣지 않았다. 마스터 이는 그저 이 땅이 최고의 지식인은 도란임을 굳게 믿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현세에 최고의 지식을 습득한 사람은 바로 도란뿐이다.’

 

마스터 이는 스스로 그렇게 결론을 지었다. 그것은 도란의 지식에 대한 마스터 이의 깊은 신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신뢰감은 라이즈를 대하고 있는 이 순간에도 변함이 없었다.

 

라이즈는 고개를 숙이며 마스터 이에게 인사했다.

 

“이렇게나마 직접 만나 보게 되다니 참으로 반갑습니다.”

 

마스터 이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은 채 낮은 음성으로 중얼거리듯 말했다.

 

“도란은 당신이 지식학회가 배출한 최고의 마법사라고 말했다.”

 

그의 말에 라이즈가 큰 웃음을 터트렸다.

 

“과찬의 말씀입니다! 도란은 항상 저보다 한발 짝 앞서나갔었죠. 그의 지식은 저보다 한수 위입니다.”

 

라이즈 일행의 방문은 아이오니아 전역에 소식이 퍼져나갔다.

마스터 이와 오공의 안내로 라이즈 일행이 마을에 들어섰을 때, 소식을 접한 도란이 신발도 신지 않은 채 달려 나왔다.

 

“아니, 이게 누군가?! 라이즈가 아닌가!”

“도란, 오래간만일세. 이런 섬에서 조용히 연구만 하느라 그동안 소식이 없었는가?”

 

도란과 라이즈는 서로 두 손을 맞잡은 채 인사를 나누었다.

 

오공은 도란이 그토록 기뻐하는 모습을 처음 보았다.

 

주민들도 라이즈 일행이 도란을 찾아온 손님이라는 것을 알고 함께 기뻐했다.

 

“자, 우리 둘의 인사는 천천히 나누기로 하고, 촌장님께 인사부터 하는 것이 순서일 듯싶네.”

 

도란과 라이즈 일행은 오반의 거처가 있는 곳으로 이동했다.

 

라이즈는 어린아이처럼 기뻐하는 도란의 모습을 보면서 이십 년 전과 조금도 달라진 것이 없음을 느꼈다.

 

“가만 보니 자네가 이곳에 눌러 사는 이유를 알 것 같네.”

“하하하! 이 섬은 나에게는 과분할 정도로 넓고도 넓네.”

 

도란은 크게 웃음을 터트리다가 문득 생각난 듯 물었다.

 

“피어스님은 어떻게 지내시는가?”

 

도란의 질문에 라이즈의 표정이 일시 어두워졌다.

 

“이제 나이가 많이 드셔서 상태가 그리 좋지 못하시네.”

 

라이즈의 대답에 도란은 굳어버린 채 자리에 멈춰 섰다. 그는 이내 씁쓸한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도란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멈춰선 걸음을 다시 옮기며 말했다.

 

“지식학회를 떠나온 후로 한번을 찾아뵙지 못했으니 많이 서운해 하셨을 것일세.”

“아니, 그 반대네.”

 

라이즈는 살짝 굳은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피어스님은 그 당시 자네를 질책한 것에 대해 크게 후회하셨네.”

“그게 무슨 말인가?”

 

도란이 깜짝 놀라며 물었다.

 

“혹시 내가 아이오니아에 온 뒤로 대륙에 무슨 변화가 생긴 것인가?”

 

라이즈는 잠시 도란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더니 질문에 답했다.


 

“자네의 예측대로 세상은 변했네. 대륙을 지배해오던 그림자 제국이 무너지고, 데마시아 왕국의 시대가 도래했다네.”

“.....”

 

라이즈의 대답에 도란의 얼굴빛이 복잡해져갔다.

 

지식학회를 떠나오던 이십 년 전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뇌리를 스쳐갔다.

 

당시 언데드의 나라였던 그림자 제국의 황실은 지식학회의 학회장 피어스에게 황태자에게 학문을 가르쳐줄 학자를 보내 달라 명했다.

 

황태자를 가르치는 역할을 한다는 것은 실로 엄청난 출세를 보장받을 수 있는 길이었다.

 

이에 피어스는 도란을 추천했다.

 

그러나 도란은 피어스의 호의를 단호하게 거절해 버렸다.

 

인간의 몸으로 언데드가 세운 황실에서 일을 할 수 없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피어스는 도란이 그런 사소한 이유 때문에 큰 그림을 보지 못한다고 나무랐다.

 

[장래에 그림자 제국을 이끌어갈 황태자에게 올바른 지식을 전수한다면 이는 곧 발로란의 평화에 직결될 것이다.]

 

피어스의 꾸짖음에 도란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죽어있는 나무에 아무리 물을 뿌려본들 그 나무는 죽은 나무입니다. 그림자 제국 황실의 운명 또한 그와 같습니다. 그림자 제국은 머지않아 죽은 나무가 될 것입니다.]

 

도란의 반박은 삽시간에 지식학회 전체에 퍼졌고, 이 내용은 그림자 제국 황실에까지 흘러들어갔다. 도란의 목숨은 바람 앞의 등불과도 같았다.

 

하지만 도란은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는 그림자 제국 황실 측에서 자신을 사살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는 소식을 듣고, 지식학회를 떠나 발로란 대륙에서 자취를 감춰버렸던 것이다.

 

“피어스님은 얼마 전에서야 비로소 자네가 이곳 아이오니아에 있다는 사실을 말씀해주셨네.”

 

라이즈는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도란, 자네는 참으로 매정하군. 그런 사실을 나에게도 미리 말을 해주었다면 더 일찍 자네를 찾아왔을 것이 아닌가?”

 

도란은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빠른 걸음으로 등을 보이며 걸음을 재촉할 뿐이었다. 라이즈는 그의 어깨가 가볍게 떨리는 것으로 보아 필시 그가 흐느끼고 있음을 눈치 챘다.

 

그 눈물은 분명 지난날에 대한 그리움의 눈물일 것이다.

 

주민들이 점점 더 몰려들어 라이즈 일행을 지켜보는 가운데 일행은 어느새 오반의 거처에 도착했다.

 

해적을 제외하고 백여 년 만에 처음으로 손님을 맞이한 아이오니아는 삽시간에 잔치 분위기로 휩싸였다.

 

마을 주민들은 너도나도 할 것 없이 싱싱한 생선, 채소와 과일로 마당을 진수성찬으로 채웠다.

 

도란과 라이즈, 그리고 마스터 이는 별실 안에서 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었고, 라이즈를 따라온 일행들은 주민들과 어울려 술잔을 돌리고 있었다.

 

순박한 원숭이들의 대접을 받은 라이즈와 그의 일행들은 큰 감동을 받았다. 하지만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굳은 표정을 짓고 있는 두 사람이 있었다.

 

바로 오공과 소녀였다.

 

서로의 시선이 마주칠 때 마다 소녀는 콧방귀를 끼며 얼굴을 돌렸다.

 

‘화를 내는 표정도 귀엽구나.’

 

오공이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바로 그때, 주위가 조용해지더니, 모두의 시선이 한 곳을 향했다. 순백의 비단 옷 차림의 늙은 원숭이가 등장했다.

 

이에 주민들은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 늙은 원숭이에게 허리를 굽히며 깍듯이 인사했다. 그런 사람들의 표정에는 진정한 존경의 빛이 담겨져 있었다.

 

소녀를 비롯한 라이즈 일행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그렇다. 이 늙은 원숭이가 바로 아이오니아를 다스리는 촌장, 오반이었다.

 

“허허허... 많은 손님들이 오셨구려.”

 

오반은 온화한 미소를 머금으며 찬찬히 사람들을 살펴보더니 이내 오공을 응시했다.

 

“보아하니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이로구나. 혹시 오공이라는 원숭이를 알고 있느냐?”

“네? 무슨 말씀인지...”

“그 원숭이는 하나밖에 없는 내 손자다.”

 

오반은 별실을 향해 걸어 들어가며 느릿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혹, 그 원숭이를 보게 된다면 나에게 문안인사를 꼭 드리라고 전해다오.”

“할...할아버지...”

 

오공의 표정이 일그러지자 주민들은 일제히 소리 내며 웃었다.

 

“할아버지. 겨우 이틀 동안 인사를 드리지 못했다고요...”

 

헛기침을 하던 오공의 시선은 소녀의 얼굴을 향했다. 소녀는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으며 오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오공은 그녀의 화가 아까보다는 많이 가라앉은 것을 느꼈다. 그리고 동시에 후회감이 밀려왔다.

 

‘내가 설치지만 않았어도 어쩌면 그녀에게 발로란 대륙의 이야기를 자세히 들었을지도 모른다.’

 

그의 시선이 별채로 옮겨졌다.

 

‘할아버지도 발로란에 대해 궁금해 하시겠지?’

 

오공의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오반은 라이즈와 인사를 나누고, 자리에 앉자마자 발로란의 정세에 대해 물어보았다.

 

“지금의 발로란은 일촉즉발의 위기 상황입니다. 대륙의 동쪽 지방 출신의 ‘오를론’이 그림자 제국을 대륙 밖으로 몰아내고 데마시아 왕국을 세우면서 생긴 혼란이죠.”

“흐음...”

 

오반이 흰 수염을 쓰다듬으며 물었다.

 

“오를론이라는 인물은 인간입니까?”

“네.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발로란의 영웅들은 데마시아 왕국을 따르는 세력과, 군도로 밀려난 그림자 제국을 추종하는 두 개의 세력으로 크게 분열 되어 있겠군요.”

 

오반의 말에 라이즈는 속으로 크게 놀랐다.

 

‘평생을 이 섬에서 지냈을 터인데, 대륙의 정세를 이토록 빠르게 판단하다니...!’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어갔다.

 

“제대로 보셨습니다. 영웅계는 큰 혼란에 직면해있는 상황입니다.”

 

데마시아 왕국을 건국한 오를론은 ‘질서’와 ‘선’을 내세우며 나라를 통치하려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새로운 왕국의 탄생을 경계하는 세력들은 그림자 제국의 황실과 밀착되어 있었던 길드들이었다.

 

그 길드들은 ‘녹서스’ 라는 도시를 중심으로 뭉쳐 있었다.

 

그곳의 길드들은 그림자 제국의 후광을 받아 단기간에 세력을 확장시켜, 영웅들을 이끌었던 집단이었다.

 

그러나, 지금껏 영웅계의 지배세력으로 군림하던 녹서스 길드연합은 데마시아 왕국의 건국과 함께 그 위세가 몰락하는 처지가 되었고, 입지마저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렀다.

 

영웅계는 큰 힘의 공백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녹서스 길드연합이 무너지고 그동안 기를 펴지 못한 발로란의 영웅들은 제각기 자신의 출신지역에서 신흥길드와 클랜을 만들었고, 자신들의 세력과 입지를 강화시키기 위해 끊임없는 전투를 치르고 있었다.

 

이것이 라이즈가 말한 일촉즉발의 위기 상황인 것이었다.

 

“결국 사태를 수습할 수 없음을 느낀 각 길드의 마스터들은 한 자리에 모여 혼란을 종식시키기 위한 방안을 마련했습니다.”

 

여기까지 말한 라이즈는 잠시 말을 멈추고 오반의 표정을 살폈다. 항상 온화하기만 한 오반의 표정은 어느새 무겁게 굳어져있었다. 도란 또한 깊은 생각에 잠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러나 마스터 이는 무표정한 얼굴로 차를 마실 뿐이었다.

 

“발로란의 길드들이 어떤 방안을 마련했는지 도란, 자네가 한번 맞춰보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