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미한 불빛이 전방에 나타났다. 오공은 자신이 환각을 보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본능적으로 사력을 다해 불빛을 향해 헤엄쳤다. 그 불빛은 거대한 범선에서 흘러나온 것이었다. 폭풍 속에서도 거대한 범선은 힘차게 전진하고 있었다. 범선으로 가까이 접근한 오공은 허리춤에 찬 단검을 꺼내 배의 옆면을 찔렀다. 항해하는 범선에 매달린 오공은 배의 옆면을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오공의 의식은 점점 희미해져갔다.


 한 순간 어둠이 그의 눈을 뒤덮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오공은 어느 실내의 침대에 누워있는 상태로 깨어났다.
 

 “어떻게 된 일이지?”


 그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실내는 깔끔하게 정돈된 분위기였다.


 오공은 힘겹게 몸을 일으켜 창가로 다가서서 커튼을 젖혔다.


 그의 동공이 크게 확장되었다. 창밖의 풍경은 화창한 날씨와 잔잔한 바다였다. 그는 그제야 자신이 범선의 실내에 있다는 걸 알았다. 범선의 크기는 거대했기 때문에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폭풍 속에서 봤던 배가 환각이 아니었구나.”


 그는 무의식상태에서 거대한 범선을 발견했던 일들을 떠올렸다. 그리고 지금 그 범선 위에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이렇게 큰 범선은 처음이구나.”


 그때 등 뒤 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지며 한 여인의 음성이 들려왔다.


 “어머, 깨어나셨네요.”


 오공이 돌아보니 단정한 옷차림의 인간 소녀가 찻주전자를 들고 서있었다.


 그는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저를 구해주신 분이 당신이었군요.”
 “아...”


 소녀는 약간 당황하더니 이내 방긋 웃으며 말했다.


 “제가 구한 것이 아니에요. 저는 이곳에서 주방 일을 돕는 사람에 불과해요.”
 “아 그렇다면 이 배의 책임자는?”
 “호홋!”


 소녀는 오공의 어리둥절한 표정이 재미있어 보였는지 손을 가리고 웃더니 대답했다.


 “이곳의 선주는 이즈리얼님이에요. 매우 젊으신 분이죠.”
 “이즈리얼?”
 “네. 그분은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시며 물건을 사고파는 일을 하세요. 북쪽일대에서 물건들을 구입해서 다시 남쪽으로 판매하는 것이죠. 그리고 이즈리얼님은 얼굴도 무척이나 잘생기셨고...”


 시녀는 얼굴을 붉힘과 동시에 자랑스럽게 설명하고 있었다.


 한 눈에 보기에도 이즈리얼이라는 사람을 마음에 두고 있는 표정이 역력했다.


 “이런 큰 배의 주인이라면 엄청난 부자겠군요.”
 “물론이죠! 이런 배를 수십 척 더 가지고 계시니까요.”


 오공은 점점 이즈리얼이라는 인물에 대해 호기심이 생겼다.


 소녀는 웃으며 말을 이었다.


 “이틀 전에 북해를 지나가던 중, 폭풍우를 만났어요. 그래서 근처 항구에서 정박한 후 떠나오는 길이에요.”
 “잠깐. 그 말은 내가 이틀 만에 깨어났다는 건가요?”
 “네. 맞아요.”


 소녀는 경이로운 눈빛으로 오공을 살피더니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기... 궁금한 것이 하나 있는데...”
 “말씀해보시죠.”
 “어떻게 그런 무서운 폭풍 속에서 살아남으신 거죠? 그쪽이 갑자기 배 위의 갑판에 나타났을 때 선원들의 말로는 원숭이 유령인줄 알았대요.”
 “하하... 내 몰골이 말이 아니었겠군요.”
 “그것보다... 생각해보세요. 그런 엄청난 폭풍 속에서 갑자기 갑판 위로 원숭... 아, 사람이 기어올랐으니 누가 놀라지 않겠어요?”
 “듣고 보니 그렇네요.”


 오공은 방긋 웃으며 진중하게 부탁했다.


 “이즈리얼이라는 분에게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은데 만나볼 수 있을까요?”
 “네. 제가 가서 말씀드릴 테니 잠시만 기다리세요.”


 소녀는 오공에게 차를 따라주고는 밖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잠시 후, 소녀가 다시 모습을 보였고 오공은 그녀를 따라 선실 밖으로 나왔다.


 범선의 크기는 생각했던 것 보다 훨씬 거대했다. 배위에는 건장한 체격의 선원들이 부지런히 이곳저곳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몇 개의 선실을 지나치고 큰 선실로 보이는 곳 앞에 도착하자 소녀가 말했다.


 “기다리고 계시니 들어가 보세요.”


 오공은 선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선실 내부는 아주 정갈하게 꾸며져 있었고, 벽면에는 작품이라 할 정도의 훌륭한 풍경화 들이 걸려있었다. 그리고 또 다른 벽면에는 난생처음 보는 다양한 물건들이 장식장에 전시되어 있었다.
 

 ‘이런 분위기의 방은 난생처음이구나.’


 오공이 속으로 감탄하며 실내 안으로 더 들어서자, 그의 시야에 선실 창가에서 밖을 바라보는 한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저 남자가 이 배의 주인?’


 순백의 연미복을 걸친 청년의 외모는 매우 준수해보였다. 금발의 머리와 날카로운 콧날, 사물을 빨아들일 듯한 푸른 눈동자는 예사롭지가 않았다.


 오공은 청년의 고급스러운 모습에 감탄하며 매료되고 말았다.


 일전에 라이즈의 모습을 보고 감탄한 적이 있지만, 지금 눈앞에 보이는 청년의 외모가 훨씬 더 멋졌다.


 ‘아직 내가 온 것을 모르는가 보군.’


 오공은 기척을 내지 않았다.


 그것은 예의를 지키기 위해서가 아닌 창밖을 바라보는 그의 모습을 더 지켜보는 것이 좋았던 것이다.


 조용한 정적이 흐르고...


 창밖의 풍경을 감상하던 이즈리얼이 몸을 돌리자 원숭이 한 마리가 서있는 것을 보았다.


 “아 이런, 손님을 불러놓고 결례를 범했군요.”


 이즈리얼이 미안해하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아,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오공도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이즈리얼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번졌다.


 “저는 이 배의 주인 이즈리얼이라고 합니다.”
 “오공입니다.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하하... 오공씨 스스로의 힘으로 위기를 벗어났을 뿐, 저는 한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이즈리얼씨의 배가 때맞춰 나타나지 않았다면 이렇게 살아있을 수 없었겠죠.”


 오공이 환하게 미소 지었다.


 “자, 앉으시죠.”


 그는 오공에게 자리를 권하며 말했다.


 “오공씨가 살아있는 건 하늘의 뜻이겠죠. 그런데 어쩌다가 그런 풍랑 속에 휩쓸리게 된 건가요?”


 오공이 쓴웃음을 지었다.


 “저는 아이오니아를 떠나 발로란으로 향하던 중 풍랑을 만났습니다.”
 “아이오니아라면... 북서쪽에 있는 열대의 섬?”


 이즈리얼의 말에 오공이 고개를 끄덕였다.


 “외부 사람들은 그렇게 부르고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곳의 분이라니... 그렇지 않아도 저는 그 섬에 대해 관심이 많습니다. 언젠가 한번 가볼 참이었죠.”


 이즈리얼의 눈빛이 반짝거렸다.


 “그곳의 지도자는 누군가요?”
 “저의 할아버지가 촌장으로 섬을 다스리고 있습니다. 아주 인자하신 분이죠.”


 오공의 대답에 이즈리얼은 놀란 표정이 되었다.


 이처럼 뜻하지 않게 만난 인물이 바로 아이오니아를 다스리는 촌장의 손자라는 사실은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는 이미 아이오니아에 살고 있는 원숭이들의 존재를 알고 있었고 ,아이오니아의 명성도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대륙의 일에는 전혀 관여하지 않는 원숭이들의 섬.


 그렇기에 아이오니아의 원숭이들은 대륙의 많은 사람들의 호기심을 불러일으켰고, 그만큼 신비로운 미지의 섬으로 알려져 있었던 것이다.


 “오공씨께서 그런 분의 손자라니. 참으로 놀라운 일이군요.”


 이즈리얼이 놀란 것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우주류 길드와 아이오니아의 관계였다. 해상 무역을 하는 이즈리얼로선 당연히 대륙 남쪽일대에서 활동 중 인 우주류 길드의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있었던 것이다.


 우주류 길드에서 필요로 하는 물품들 중 많은 부분이 이즈리얼의 배를 통해 거래 되었고, 남쪽바다 일대 해적을 경계해야 하는 이즈리얼의 입장에서도 우주류 길드의 존재는 큰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다.


 자연스럽게 이즈리얼은 우주류 길드를 통해 아이오니아의 이야기를 전해 들었었다. 백 여 년 전 원숭이 ‘오청’이 무리를 이끌고 아이오니아에 정착하게 된 사연, 그리고 오래전부터 그곳으로 사람을 보내 우주류 길드로 돌아오도록 설득 한 일. 그리고 아직까지 합치지 못한 일 등등...


 현재 우주류 길드의 마스터는 ‘자라칸’이라는 인물이었다.


 이즈리얼은 이미 자라칸과 만난 적이 있었고, 그는 추진력이 강한 인물이어서, 머지않아 아이오니아를 흡수하고야말 것이라 짐작했었다.


 이런 저런 이유들 때문에 오공을 바라보는 이즈리얼은 그저 놀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어쩌면 우리가 이렇게 만난 것도 우연이 아닌 것 같군요. 괜찮다면 술이나 한잔 하면서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데 괜찮은가요?”


 이즈리얼이 정중히 부탁했다.


 오공은 그의 부탁을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이즈리얼은 책상위의 있는 버튼을 눌렀다. 벨 소리를 들은 소녀가 이내 모습을 드러냈다.


 술상이 곧 들어오고, 두 사람은 서로 잔을 권하며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눴다.


 이즈리얼은 멋진 외모와 함께 실로 박학다식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가 단순히 유식하기만 한 사람은 절대 아니었다.


 이즈리얼의 마음속에는 왠지 모를 정의감이 불타고 있었고 자신이 옳다고 믿으면 어떤 상대에게도 굴하지 않는 자존감이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그는 누구의 도움 없이 젊은 나이에 바다를 주름잡는 거상이 된 것이다.


 “넌 정말 대단하구나.”


 둘은 어느새 친해져 편하게 말을 주고받는 사이가 되었다. 나이대가 비슷한 두 사람은 인간과 원숭이의 사이를 떠나 진정한 친구가 된 것이었다.


 오공의 말에 이즈리얼은 껄껄 웃더니 고개를 내저었다.


 “부끄럽군. 너 또한 범상치 않아 보이는 걸? 훗날 세상을 주름잡을 것 같단 말이야.”


 둘의 시선이 뜨겁게 부딪쳤다.


 범선은 어느새 어둠이 내려앉은 바다 한가운데를 항해하고 있었다.


 둘의 대화는 멈출 줄을 몰랐다.


 수평선에서 여명이 밝아올 무렵이 되어서야 대화는 끝이 났고 둘은 헤어졌다. 이즈리얼의 지시를 받은 선원들이 오공에게 대하는 태도가 조심스러워졌다.


 어느새 오공에게는 훌륭한 선실이 주어졌고, 고급스러운 음식들이 끼니마다 제공되었다. 두 사람은 매일 서로의 선실을 번갈아 방문하며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그렇게 일주일이 지났다.


 범선은 북해를 벗어나 동해로 접어들고 있었다.


 오공은 범선의 최종 행선지가 ‘밴들시티’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실로 먼 거리였다. 그러나 '이케시아‘에 잠시 정박할 예정이었으므로, 오공은 그곳에 내릴 참이었다.


 이즈리얼은 데마시아에서 생산되는 다양한 식재료들을 밴들시티로 가져가 팔 예정이었던 것이다.


 발로란 대륙에 첫발을 내딛는 오공에게는 모든 것들이 신기하게만 느껴졌다. 그러나 이즈리얼에게서 느껴지는 신비로움에는 미치지 못했다.


 이즈리얼에 대한 선원들의 존경심은 절대적이었다.


 마치 신을 따르는 듯 그에게 복종했으며, 그가 내뱉는 말 한마디 한마디는 경전처럼 숭배되었다.


 이즈리얼에게는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신비한 매력이 있었다.


 어떤 사람이라도 그와 눈을 마주치고 몇 마디 대화를 나누면, 그 매력에서 벗어나기 어려울 것이다. 오공은 그러한 이즈리얼에게 경이로움이 느껴질 정도였다.


 그리고 이즈리얼은 엄청난 양의 마나를 몸속에 지니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거친 바다를 터전으로 하는 무역업은 보통의 사람으로선 쉽게 해낼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즈리얼은 단 한 번도 싸움이나, 마법에 대해 언급한 적이 없었다. 마치 그것들을 전혀 모르는 사람처럼...


 그러나 오공은 의아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강한 맹수일수록 발톱을 감추는 법이었으니...



 * * *



 오공이 아이오니아를 떠난 지 열흘이 지났다.


 이즈리얼의 범선은 어느새 이케시아 앞바다로 들어섰다.


 고대 왕국이었던 ‘크림슨 왕국’의 수도로서 영화를 누렸던 이케시아는 아름다운 풍경으로 인해 많은 마법사들과 학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도시였다.


 오공은 멀리서 드러나는 대륙의 지평선을 보았다.


 그토록 염원하던 발로란 대륙이 이제 눈앞으로 성큼 다가선 것이다. 그는 범선이 이케시아에 도착하기까지 하루 동안 갑판 위에서 시간을 보냈다.


 드디어 범선은 정오가 되자 항구에 도착했다.


 “배가 하루만 더 늦게 도착했으면 아마 넌 동상이 되었을 거야.”


 이즈리얼이 웃음소리와 함께 갑판에 서 있는 오공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너와 함께 했던 시간은 절대 있지 않을게.”
 “밴들 시티까지 동행했으면 좋겠는데 무리한 부탁이겠지?”


 이즈리얼은 아쉬움이 가득한 눈길로 오공을 쳐다봤다.


 어느새 범선은 항구에 정박했고, 배에서는 여러 개의 사다리가 내려왔다. 이곳 이케시아에도 이즈리얼의 사람들이 많았다. 그들은 여러 가지 물건들을 일사불란하게 배에 실었고, 배의 선원들은 하역할 물건들을 부지런히 내렸다.


 “나도 도울게.”


 오공이 거들려고 하자 이즈리얼이 방긋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럴 필요 없어. 순식간에 끝날 일이야.”


 그의 말은 조금도 거짓이 없었다.


 사다리를 타고 두 사람이 배에서 내려서자마자, 한 선원이 작업이 종료된 것을 알리는 깃발을 힘차게 흔들어댔다.


 “속도가 장난이 아니구나.”


 오공이 혀를 내둘렀다.


 “이즈. 그동안 너에게 많은 것을 배웠어.”
 “그건 내가 하고 싶은 말이야. 밴들시티에 다녀오는 대로 기회를 봐서 아이오니아에 한번 들러볼 생각이야.”
 “할아버지를 비롯해 모두가 크게 반길 거야.”


 그렇지 않아도 배가 침몰해 모두 죽는 바람에 소식을 전할 일이 걱정이 되었던 오공이었다. 이즈리얼이 아이오니아를 방문해서 소식을 전해준다면 걱정은 한시름 덜게 되는 셈이었다.


 두 사람은 서로의 손을 굳게 잡으며 다시 만날 것을 기약했다.


 “기회가 된다면 또 보게 되겠지?”
 “물론!”


 오공이 힘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즈리얼은 몸을 돌려 배 위로 올랐다.


 이윽고 배는 천천히 바다 쪽으로 방향을 돌리며 떠나기 시작했다. 이즈리얼은 갑판 위에 서서 오공을 바라보았다.


 오공은 한동안 멀어지는 배를 지켜보며 서있었다. 그는 오공이 아이오니아를 벗어난 후 맨 처음으로 인연을 맺은 인물이었다.


 “이즈리얼, 정말 좋은 친구다. 그를 만난 건 큰 행운이었어.”


 오공은 아쉬움을 달래며 몸을 돌렸다.


 걸어가던 그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글거리는 태양이 빛을 내뿜으며 하늘을 물들이고 있었다.


 그 시각.


 범선의 이즈리얼 또한 하늘의 태양을 말없이 응시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