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품에서 가루약을 꺼냈다.


 그리고 상처가 난 부위마다 가루약을 뿌린 후, 다시 품속에서 해독 포션을 꺼내 한 모금 마시게 했다. 오공의 주변에는 어느새 많은 사람들이 모여 의심의 눈초리로 지켜보고 있었다.


 “덮을 것이 있다면 이분의 몸을 따뜻하게 해주세요. 전 다른 부상자들을 살펴보겠습니다.”
 “그 말은 죽지 않는다는 것인가?”


 헤인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곧 정신을 차리고 깨어나실 겁니다.”


 그 말을 남기고 오공은 다른 부상자들을 살폈다.


 약간의 시간이 흐르자 녹색으로 물들었던 살갗이 원래대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오...!”
 “살아났다!”


 지켜보던 인물들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이것은 기적과도 같은 일이었다. 란트의 얼굴은 당황의 빛이 역력했다.


 리안의 입가에는 뜻 모를 미소가 번져나갔다.


 “아무래도 오빠가 성급했던 것 같아.”


 그녀의 말에 란트의 표정이 심하게 일그러졌다.


 ‘설마 저 원숭이 놈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인가?’


 피오라는 내심 오공에게 놀라움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 치료에 열중하고 있는 오공에게 물었다.


 “놈들이 무슨 독을 사용한 것이죠?”
 “이들은 이곳에 온 뒤로 독에 중독되었습니다.”
 “이곳에서?”


 뜻하지 않은 오공의 대답에 피오라의 안색이 굳어졌다.


 오공은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이 협곡 안은 오랜 세월 쌓인 낙엽이 지천에 깔려있습니다. 낙엽들은 부식되면서 물이 생기게 되는데 이 물들이 다른 곳으로 흐르지 못하고 고여 있게 되면 독성분이 생기게 되죠.”
 “아, 그렇군요.”
 “그렇게 해서 발생된 독은 건강한 사람의 몸에 닿아도 위험합니다. 그런데 상처가 난 부상자들의 몸에 독이 스며들면 매우 치명적입니다.”


 오공은 설명을 하는 순간에도 능수능란하게 부상자들을 치료했다.


 피오라는 크게 감탄했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다 죽어가는 사람들이 하나 둘 정신을 차리는 것을 보고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암다르는 잠시나마 오공을 의심한 자신을 질책했다.


 ‘한 사람의 말만 듣고 청년을 의심했구나!’


 그러한 마음은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부상자들의 치료를 끝마친 오공이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위급한 상황은 넘겼지만 이곳에 부상자들을 오래두면 또 같은 일이 발생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저로써도 손쓸 도리가 없죠. 어서 이곳을 빠져나가야 합니다.”


 피오라의 표정이 다시 무거워졌다.


 오공이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부상자들이 아니더라도 이곳에 오래 있으면 모두 중독이 될 것입니다.”


 헤인이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제 보니 레드윈드 놈들이 협곡 안으로 쳐들어오지 않은 데에는 이유가 있었나보군!”


 그는 피오라를 보며 말했다.


 “나는 이 청년을 믿기로 했네. 케넨이 발견했다는 동굴로 어서 이동하세.”
 “나 역시 찬성일세.”


 에이젠이 신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들의 시선은 피오라에게 고정되었다.


 피오라는 비로소 자신이 결정을 내려야 할 때가 왔음을 깨달았다.



 * * *



 어둠이 희미해져 가고 있었다.


 한 여인이 때오르는 태양을 등진 채 우두커니 서있었다.


 강철보다 단단하게 굳은 무거운 표정, 투구 속에 삐져나온 은빛 머리카락, 어깨에 걸친 핏빛의 망토, 그 누구도 감히 마주치지 못할 듯한 푸른 눈동자, 쫙 달라붙는 가죽 타이즈 차림의 매혹적인 몸매...


 그녀는 바로 레드윈드의 마스터 리븐이었다.


 녹서스에서 다리우스가 불멸의 요새의 군대를 이끌고 등장하기 전까지만 해도 그녀는 대륙 동쪽의 영웅들 중에서 가장 강했다. 그 누구와도 자신과 비교되는 것조차 용납할 수 없는 강한 자존심의 그녀였다.


 그녀는 뛰어난 두뇌와 무수히 많은 싸움을 치러 왔으며, 지금은 전쟁학회 영웅들을 궁지에 몰아넣고 있었다.


 그녀의 나이는 삼십대 후반을 지나고 있었다. 그 세월동안 그녀는 그 어떤 어려운 상황에서도 승리에 대해 확신을 지니지 않은 적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녀의 심기는 한없이 무거웠다.


 이것은 필시 불길한 일이었다.


 우르곳. 그녀의 오른팔을 자처하며 따르던 그의 시신을 리븐이 응시했다.


 무거운 탄식이 그녀의 입으로 흘러나왔다.


 “우르곳... 그대가...”


 그녀의 뒤로는 ‘카르토’를 비롯하여 레드윈드 소속의 핵심간부 십여 명이 서있었다. 그들에게 리븐의 탄식은 감당하기 어려웠다.


 그 중 한 명이 조심스럽게 입을 떼었다.


 “우르곳이 이렇게 처참하게 당하다니...”


 그의 말을 들은 리븐은 깊은 생각에 빠졌다.


 과연 누가 대체 우르곳을 이렇게 잔혹하게 죽인 것인가?


 시신은 그 답을 알려주고 있었다. 상대는 엄청난 마법을 사용하는 마법사일 것이다. 처참하게 뭉개진 우르곳의 몸을 보고 리븐은 추측했다.


 그녀는 흑담비석 산맥에 발을 디딘 자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머릿속에 떠올렸다.


 그녀의 눈빛은 깊은 호수처럼 무겁게 가라앉았다.


 우르곳 뿐만 아니라, 실력이 상당한 그의 직속 부하들마저 한 사람도 살아남지 못하고 전멸했다.


 ‘이런 능력을 발휘한 자...’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다.


 먼저 세 길드의 마스터들의 얼굴이 뇌리를 스쳐지나갔다.


 하지만 리븐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들의 수준을 잘 알고 있기에 이토록 처참하게 우르곳을 죽일 리 없었다. 그렇다면 새로운 인물?


 그것은 우르곳이 특정 무기에 당한 것이 아닌 정체를 알 수 없는 마법에 당했다는 것으로 증명되고 있었다.


 피오라는 검, 에이젠도 검을 사용한다.


 피오라의 부하들 중 미즈린이 화염마법에 일가견이 있지만 이 정도의 위력을 보일 리는 없었다.


 ‘대체 어떤 마법일까?’


 대륙 서쪽 일대에서 활동하는 영웅들과 그의 실력에 대해 손바닥 들여다보듯 파악하고 있는 그녀였다. 그러나 우르곳은 그녀가 기존에 알고 있던 인물들이 아닌 새로운 인물에 의해 죽임을 당한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이것은 그녀가 짐작하지 못한 변수였다.


 완벽함을 추구하던 리븐으로선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상대가 누구인지 알고 있다면 아무리 강한 자라 할지라도 대책을 세울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 상대가 누군지 전혀 파악이 되지 않고 있었다.


 그때 그의 옆에 있던 또 다른 부하 ‘바카즈’가 정적을 깨뜨리며 말했다.


 “마스터님! 우르곳의 죽음 때문에 공격을 늦출 순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해가 뜨기 전에 공격을 감행하기로 되어 있는데 이곳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카르토가 바카즈의 말을 거들었다.


 하지만 리븐의 침묵은 계속되었다. 그녀는 스스로 결정을 내리기 전까지는 절대 움직이지 않는 성격이었다.


 답답함을 견디지 못한 바카즈가 재촉했다.


 “마스터님! 저희들은 이번 전투를 승리로 이끌어가기 위해 적지 않은 희생을 치렀습니다. 이제 와서 속도를 늦춘다면, 오히려 저들의 계략에 당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리븐은 다시 우르곳의 시신을 보았다.


 차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잔혹함.


 바카즈의 말처럼 세 길드의 병력이 이곳에 갇혀 있다는 소문이 외부로 퍼져나가게 되면 전쟁학회 영웅들이 달려올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사실이었다.


 늦어도 3일안에 협곡에 있는 자들을 모두 죽이고 이곳을 떠야하는 상황이었다.


 리븐은 우르곳의 죽음에 대한 분노와 슬픔을 가까스로 삭히며 시선을 천천히 거두었다.


 생각지 못한 변수가 생겼지만 이제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막 입을 떼려는 순간.


 한 명의 병사가 달려와 허리를 굽히며 인사했다.


 “마스터님께 보고 드립니다!”


 모두의 시선이 병사에게 고정되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자가 협곡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리븐의 안색이 굳어졌다.


 카르토가 다급하게 물었다.


 “대체 어떤 놈이 포위망을 뚫고 협곡 안으로 들어갔단 말이냐?”
 “누구인지 정확히 알 수 는 없지만 전쟁학회의 인물 같지는 않았습니다. 그 자는 협곡입구를 지키고 있던 수십여 명의 병력을 제압하고...”


 카르토, 바카즈를 비롯한 간부들의 표정이 굳어졌다.


 리븐은 두 눈이 번뜩이며 느릿하게 입을 떼었다.


 “모두에게 전해라. 지금 당장 협곡 안으로 총공격을 시작한다. 오늘 안에 모두 궤멸시켜야 한다.”
 “네, 마스터!”


 드디어 명령이 떨어졌다.


 사태는 걷잡을 수 없게 되었다.



 * * *



 피오라의 침묵이 계속되었다.


 그러나 에이젠을 비롯, 헤인 등 나머지 인물들은 그녀의 결정을 묵묵히 기다리고 있었다. 어려운 상황에서 이들을 이끌어야 하는 인물은 피오라 뿐이었다.


 암다르의 눈길이 안타까움으로 물들었다.


 그는 여동생 피오라의 신중함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남매지간이긴 했지만 그녀가 마스터의 자리에 올랐을 때, 그는 티끌만큼의 불만도 품지 않았다. 그만큼 피오라는 로렌트 길드를 빛낼 인재임을 확신했기 때문이다. 그런 피오라가 난생 처음 위기를 겪고 있는 것이다. 로렌트 길드를 비롯하여 스트렌, 아트라마

의 길드원을 합해 270여명의 희생을 치룬 상태였으니...


 피오라의 심적인 고통과 부담감은 엄청났다.


 그리고 자존심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은 승부사의 침묵. 주변인들의 마음은 더욱 무거울 수밖에 없었다.


 “아무래도 마지막 기회가 될 것 같군요. 모두 빠져나갈 준비를 하세요.”
 “.....!”
 “.....!”


 피오라의 결정이 내려지자, 모든 인물들의 얼굴에는 비장함이 서려지기 시작했다.


 란트의 표정이 복잡해지더니, 피오라에게 말했다.


 “마스터, 만약 그 동굴이 존재해도 찾지 못하면 어쩌실 것입니까? 이건 길드의 존망이 달린 일입니다.”


 란트의 말에 암다르가 제지했다.


 “란트, 마스터께서 결정을 내리셨다. 네가 나설 자리가 아니야.”


 란트는 더 이상 말하지 못하고 입을 꾹 다물었다.


 리안은 그가 너무 옹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란트오빠는 너무 의심이 많은 것이 탈이야...’


 그의 모습과는 다르게 오공은 너무나 의젓해 보였다.


 협곡안의 인물들은 일사불란하게 밖으로 나가기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부상의 여부에 따라 대열의 선두와 후미가 정해졌다.


 준비를 끝마친 피오라를 비롯한 모든 인원이 협곡 밖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동 중, 그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모두가 극도로 긴장한 기색이었다.


 협곡 밖에서는 레드윈드의 주력 포위망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것을 뚫어야 케넨이 발견한 비밀동굴에 도착할 수 있는 것이다.


 “오공씨, 당신은 포위망을 뚫고 들어온 경험이 있으니 저들이 어떤 진형을 펼치고 있는지 보았겠죠?”


 피오라의 질문에 오공은 지체 없이 대답했다.


 “입구 쪽에 많은 병력이 지키고 있긴 하지만 지금은 포위망의 범위가 많이 넓혀졌을 것입니다.”


 오공의 예상은 이러했다. 적들은 협곡 안에서 나오는 병력보다 외부에서 들이닥칠지도 모르는 것에 대비를 더 하고 있다는 추측이었다.


 “당신의 말이 사실이라면 우리로선 다행이군요.”
 “네. 입구에 배치된 병력만 제압한다면 어렵지 않게 동굴까지 갈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동굴을 통과하기만 한다면 나머지 포위망들도 쉽게 피할 수 있겠죠.”


 그들은 리븐이 지금 현재 직접 병력을 이끌고 이곳으로 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


 점차 협곡 입구에 접근할수록 사방이 밝아지기 시작했다. 날이 밝아오는 새벽이었다.


 오공이 힘 있게 말했다.


 “협곡에서 빠져나가는 즉시, 오른쪽 방향으로 달려야 합니다.”


 새벽의 안개가 사방을 자욱하게 덮고 있었다. 탈출을 하기에는 더없이 좋은 조건이었다.


 양쪽의 절벽이 서서히 넓어지자 입구가 가까워지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일행들 모두는 약속이나 한 듯 일제기 무기를 뽑아들었다.


 스릉!


 그들이 협곡에서 빠져나와 넓은 곳으로 들어서는 순간.


 뿌우! 뿌우! 뿌우!


 사방에서 나팔소리가 새벽의 침묵을 깨고 사방에서 울려 퍼졌다.


 “레드윈드의 나팔소리다!”


 누군가의 외침으로 피오라를 비롯한 인물들은 협곡을 빠른 속도로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놈들이 탈출한다! 어서 본진에 연락해!”


 뿌! 뿌뿌! 뿌우!


 피오라가 소리치는 한 인물을 재빠르게 찔렀다.


 푸욱!


 그녀의 레이피어가 그의 뱃속을 사정없이 파고들었다.


 “아아악!”


 이내 사방에서 무기가 부딪치는 소리와 비명소리가 울려 퍼졌다.


 챙!


 채챙!


 “으악!”


 자욱했던 안개는 협곡 밖으로 나아갈수록 엷어졌다.


 협곡의 입구를 지키고 있던 레드윈드 병력들은 반원으로 진을 형성하며 피오라 일행들을 막았다.


 “어리석은 놈들!”
 “저들을 막아라!”
 “와아!”


 혼신의 힘을 다해 죽을 각오로 탈출을 감행한 이들의 폭풍 같은 공격이 시작되었다. 레드윈드의 병력의 방어진이 순식간에 무너졌다.


 “런지!”


 피오라의 입에서 일성이 터져 울렸다.


 그녀의 레이피어가 푸른빛으로 감돌기 시작했다. 그리고 춤을 추듯, 그녀의 검무가 전개되었다. 그의 앞을 막아서던 레드윈드 인물들은 그녀의 검무에 넋을 잃었다. 푸른빛의 검무! 그것은 실로 아름다웠다. 그러나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도 잠시, 그녀의 레이피어는 어느새 적들의 목을 날려버리고 있었다.


 “피...피오라다! 아악!”


 헤인의 도끼가 한번 휘둘러질 때마다 서너 명의 목숨을 한 번에 앗아갔다. 에이젠의 대검도 그에 못지않았다. 윙윙 거리며 휘둘러지는 그의 대검에 적들의 몸뚱이는 사정없이 터져나갔다.


 붕!


 오공은 쉴 새 없이 여의봉으로 적을 쓰러트리는 와중에 세 길드의 마스터가 펼쳐내는 공격을 경이로운 눈길로 바라봤다. 그들은 우르곳과는 또 다른 차원의 힘을 그에게 보여주고 있었다.


 특히 피오라의 검무는 신들린 듯 아름답게 펼쳐졌다.


 ‘춤을 추는 것인지 싸우는 것인지 알 수가 없구나!’


 피오라의 검무는 그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그녀만이 사용 할 수 있는 고유능력이었다.


 레드윈드의 포위망이 무너지기 일보 직전에 처했다.


 “크허허헉!”
 “아아악!”


 그러나 세 길드의 피해도 가볍지 않았다. 부상을 당한 상태로 싸우던 사람들이 가장 먼저 쓰러졌다.


 한쪽에서는 란트와 리안이 서로의 등을 맞대며 포위당한 채 싸우고 있었다.


 그 모든 상황을 한눈에 훑어본 오공은 내심 초조해졌다.


 ‘시간을 끌면 끌수록 불리하다!’


 그는 우르곳과 그의 부하들을 처참하게 죽인 것에 대한 죄책감으로 가능하면 적들의 생명을 빼앗아 가진 않았다. 그러나 이내 그 마음을 고쳐먹었다.


 부우우웅!


 여의봉이 허공을 갈랐다. 그의 시야에 잡힌 인물은 병력을 지휘하고 있는 ‘모스’였다. 그는 에이젠을 구석으로 몰아넣으며 공격을 퍼붓고 있었다.


 “우주류 봉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