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즈 일행이 섬을 떠난 지 보름이 지났다.


 도란은 그 사이 아예 다른 사람으로 변해있었다.


 항상 밝기 만했던 그의 얼굴에서 이제 웃음을 좀처럼 찾아보기 어려웠다.


 그리고 언덕위에 올라 먼 바다를 바라보는 시간이 많아졌다.


 오공은 그런 도란에게 평소처럼 농담을 건네고 장난도 쳐보았지만 별다른 소득이 없었다.


 마스터 이는 며칠째 동굴에 쳐 박혀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라이즈 일행의 방문은 촌장 오반에게도 적잖은 영향을 끼쳤다. 전쟁학회에 가입해달라는 라이즈의 권유가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던 것이다.


 지난 백여 년 동안 아이오니아는 순박한 원숭이들의 삶의 터전이었다.


 이제 와서 그들에게 섬을 떠나 혼란만 가득한 발로란 대륙으로 나가게 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라이즈의 말대로 발로란 대륙에서 전쟁이 일어나 영웅들끼리 서로 칼날을 겨누게 된다면 이는 두고 볼 수만은 없었던 것이다.


 오반은 결국, 고심한 끝에 정기적으로 사람을 대륙으로 내보내 정세를 파악한 후에 최후 결정을 내려도 늦지 않다고 판단했다.


 다른 이들과는 달리. 오공은 라이즈 일행이 떠난 이후 오히려 더욱 씩씩해진 것 같았다.


 모든 잡념을 떨쳐버리기 위해 매일 우주류 봉술 훈련에 매진했다. 주민들은 오공이 전과 많이 달라졌다며 수근 거렸다.


 초저녁 무렵.


 모래사장에서 하루 종일 봉술을 연습하던 오공은 잠시 동작을 멈추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더 이상 늘지가 않는구나.”


 휘이잉...


 후끈한 바람이 그의 몸을 휘감으며 스쳐지나갔다.


 “이는 마나가 부족한 탓...”


 피로를 느낀 오공은 모래사장에 벌러덩 드러누워 하늘을 바라보았다.


 “더 이상 연습해 봤자 시간낭비다.”


 오공이 슬며시 눈을 감으며 휴식을 취할 때 번뜩 그의 뇌리에 잊고 있었던 한 가지 일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아, 검은 돌!”


 정신이 번쩍 든 오공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라이즈 일행의 방문 때문에 검은 돌의 존재를 까맣게 잊고 지냈던 것이다. 그의 시선이 하늘에 떠있는 달로 향했다.


 “며칠만 지나면 보름달이 뜨겠군.”


 보름달. 그 날이 되면 어김없이 끔찍한 악몽에 시달릴 것이다.


 ‘더 이상 악몽에 시달릴 수 없어. 반드시 해결해야 돼!’


 그러나 해결할 방법은 황금석상이 있는 곳으로 가는 것뿐이었다.


 ‘저주가 두려워 포기한다면 최고가 될 수 없다!’


 이를 악문 오공은 달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좋아. 가보자! 저주에 걸려 미쳐버리는 한이 있어도 가보는 거야!”


 이와 같은 결심을 하기까지 참으로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결정을 내린 지금, 그의 머릿속은 환하게 밝아지는 느낌이었다.


 “그곳으로 가기위해서는 철저한 준비가 필요하겠어.”


 깊은 밤.


 오공은 여러 가지 생각으로 인해 잠을 설쳤다.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오공은 날이 밝기가 무섭게 도란의 집으로 달려갔다.


 도란은 요즘 밖에 머물고 있는 시간이 많아졌기에 오공은 그의 물건 중 몇 가지를 몰래 훔칠 작정이었다.


 ‘사부님이 안 계셔야 할 텐데...’


 다행히 도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황금석상이 있는 장소로 가기 위해서는 밀림 속으로 들어가야만 한다. 아이오니아의 밀림은 예측하기가 어려운 곳이었기에 그에 따른 철저한 준비가 필요했다.


 오공은 상자를 뒤적이더니 몇 가지 물건을 찾아냈다. 그것은 밀림의 독벌레로부터 자신을 지켜줄 물건들이었다.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은 해독 포션이었다. 이것은 마시면 독을 해독시키는 능력뿐만 아니라 독벌레들이 싫어하는 냄새가 나기 때문에 몸에 지니고만 있어도 접근하지 못하는 포션이었다.


 그리고 도란이 직접 제작한 독벌레를 잡을 때 사용하는 가죽장갑도 챙겼다.


 마지막으로 챙긴 물건 또한 도란이 직접 만든 옷이었다. 웬만한 충격에도 버틸 수 있게 만들어진 가죽튜닉이었다.


 “물건들이 없어진 것을 알면 사부님이 큰 화를 내시겠지?”


 걱정이 밀려온 오공은 나지막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이미 시작한 일이었다. 오공은 재빠른 동작으로 장갑을 양손에 끼고 갑옷을 상의 속에 걸쳤다. 이어 해독 포션, 건조된 식량과 물을 챙기고 밖으로 나와 밀림이 있는 방향으로 뛰었다.


 밀림 속.


 몇 시간을 달렸을까?


 오공은 자신의 현재 위치가 마을과 멀리 떨어진 것을 확인하고서는 달리는 것을 멈추었다.


 해가 중천에 떠있는 시각이었지만 밀림 속은 짙은 어둠이 깔려 있었었다.


 “보름달이 뜨기 전에 황금석상이 있는 곳에 먼저 도착해야만 한다.”


 오공은 자신이 사라진 후 마을에서 일어날 일들을 생각해 보았다. 무엇보다 할아버지 오반이 마음에 걸렸다.


 “할아버지. 죄송해요!”


 오공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는 문득 품에서 검은 돌을 꺼내들었다.


 도란이 읽어준 돌에 새겨진 글의 내용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빛의 신 아델로니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허락받지 못한 자... 결코 빛의 석상을 깨우려 하지 마라... 어둠의 힘이 네 영혼을 집어 삼킬 것이다...]



 * * *



 처음에는 아무도 오공이 사라진 것을 알지 못했다.


 평소에 섬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던 오공이었기에 하루 이틀쯤 보이지 않는 것은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만약 도란이 자신의 연구실에서 몇 가지 물건이 사라진 것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그리고 그가 검은 돌에 관한 이야기를 오공과 나누지 않았다면, 최소한 나흘은 지나서야 오공의 사라짐을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날 외출하고 집에 돌아온 도란은 오공이 황금석상이 있는 곳을 찾아간 것이라고 바로 짐작했다.


 도란은 사태의 심각성을 느끼고 황급히 오반에게 달려가 모든 자초지종을 이야기했다.


 “이보게 도란!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그런 일이 있었다면 진작 나에게 알렸어야 마땅하거늘!”


 온화하기만 했던 오반이었지만 도란의 이야기를 들은 그는 크게 진노했다. 도란이 황망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이 모든 것이 저의 큰 잘못입니다. 그렇게 가면 안된다고 신신당부했지만 정말 가게 될 줄은...”
 “이 일을 대체 어찌한단 말인가?”


 오반은 기가 막혔다.


 지금까지 황금석상을 보고 돌아온 인물 중 살아남은 자는 단 한명도 없었다. 그 저주 받은 장소에 하나뿐인 손자, 오공이 떠나간 것이다. 이는 일족의 미래가 사라질 판국이 아니었던가.


 “지금이라도 오공의 뒤를 쫓아 그곳으로 가는 것을 막아야 합니다.”
 

 오반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당장 마스터 이를 찾아 이 일을 의논하게. 그놈을 가장 빨리 찾아낼 인물은 마스터 이밖에 없네.”
 “네. 촌장님”


 도란은 오반의 명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그의 거처에서 나와 마스터 이에게 달려갔다.


 마스터 이가 머물고 있는 동굴 앞에 도착한 그는 큰 소리로 외쳤다.


 “이보게 이사부! 어서 나오시게! 지금 동굴 속에 쳐 박혀 명상할 때가 아닐세!”


 그러나 동굴 안은 조용했다.


 도란은 그가 한번 동굴에 머물면 몇 날 며칠이고 꿈쩍도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오반조차도 마스터 이가 동굴에 머물고 있을 때는 아무리 큰 일이 있어도 부르는 것을 포기할 정도였다.


 “만약 셋을 셀 때까지 나오지 않는다면 그 순간부터 자네와 인연을 끊을 것이야!”


 도란이 큰 소리로 숫자를 외쳤다.


 “하나! 둘! 세...”


 그러자 동굴 안에서 나지막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어디서 늙은 여우 한 마리가 소란을 피우는게냐?”

 “지금 그 늙은 여우가 다 죽어가게 생겼네! 어서 밖으로 나오게!”
 “급한 일이 아니라면 난 절대 나가지 않을 것이다.”
 “오공, 그 못 말리는 원숭이 녀석이 황금석상이 있는 곳으로 향하고 있네!”


 휘이잉!


 그 순간, 동굴 안에서 돌먼지들이 소용돌이치며 밖으로 뿜어져 나왔다. 그리고 그 먼지 사이를 빠져나오는 하나의 그림자. 마스터 이였다.


 “다시 말해보거라.”


 마스터 이는 우뚝 선 채 딱딱한 말투로 말했다.


 도란이 탄식하며 그동안의 일을 설명했다.


 “한시가 급하네!”

 “크하하핫! 그저 겁 많은 원숭이인줄만 알았는데 그런 용기가 있었군!”


 마스터 이가 느닷없이 크게 웃자 도란은 그만 어이가 없었다.


 “지금 녀석의 행동을 칭찬하는 것인가?”
 “아니, 비웃은 것이다.”
 “아무튼 오공이가 황금석상을 확인하기 전에 막지 못한다면 끝장이네.”
 “음...”


 마스터 이도 그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느낀 모양이었다.


 도란은 밀림 쪽 방향으로 몸을 돌리며 말했다.


 “자네 혼자서는 힘들 것이니 나도 같이 가겠네. 밀림에 대해서는 내가 더 잘 알고 있으니깐.”
 

 휙!


 휘릭!


 둘은 바람처럼 몸을 날려 어느새 밀림 속으로 사라졌다.


 하루가 지났다.


 오공은 어느새 섬 중앙부 근처에 위치하고 있었다. 이동 중에 밀림 속에 숨어있는 늪지에 몇 번이나 빠질 뻔한 위기를 겪었다.


 사방에서 독벌레들이 공격했지만 해독 포션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면 오래 전에 죽었을 몸이었다. 밀림의 습기와 무더위는 더욱 그를 지치게 만들었다.


 ‘얼마나 깊이 들어온 것일까?’


 오공은 이마의 흐르는 땀들을 닦아내며 하늘을 바라보았다.


 울창한 나뭇가지 틈으로 노을빛이 내려앉고 있었다.


 ‘지금쯤이면 나의 행방을 모두 알았겠지?’


 할아버지 오반의 얼굴이 떠올랐고, 도란과 마스터이의 얼굴이 차례차례 떠올랐다.


 ‘모두에게 죄송합니다.’


 오공은 마음을 다시 다잡고 복잡한 잡념을 떨쳐버렸다.


 배고픔을 느낀 그는 바위에 걸터앉아 비상식량과 물을 섭취했다. 목구멍으로 음식물이 들어오자 지친 기운은 금세 샘솟았다. 그는 육포를 질겅질겅 씹어 먹으며 지도를 꺼내 자신의 위치를 확인했다.


 “와아... 어느새 이곳까지 왔구나. 조금만 더 가면 내일 밤이 되기 전에 황금석상을 볼 수 있겠군.”


 오공은 다시 힘을 내어 걸었다.


 그러나 얼마 가지 못하고 그는 걸음을 멈췄다. 갑자기 주위의 풍경이 달라져보였기 때문이다.


 사방의 나무와 풀들이 모두 검게 그을려 있었다.


 “누가 불을 질렀나? 이곳은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일 텐데... 그런데 이 냄새는 뭐지?”


 코를 찌르는 악취가 느껴지자 오공은 황급히 코를 막았다.


 “크윽! 지독한 냄새!”


 냄새가 얼마나 지독했는지 숨이 막히고 현기증이 돌 지경이었다.


 바로 그때.


 부글부글...


 오공의 손에 들고 있던 해독 포션이 끓어올랐다. 오공이 병뚜껑을 열자 하얀 연기가 피어올랐다.


 “.....!”


 식은땀 한 방울이 그의 등줄기를 타로 흘러내렸다.


 해독 포션이 끓기 시작한 것은 주변에 엄청 강한 독성을 지닌 생명체가 있다는 것을 알리는 일종의 신호였다. 보통의 독벌레에게서는 절대 보일 수 없는 반응이었다.


 오공은 굳어진 안색으로 조심스럽게 주위를 살폈다.


 그의 시야에 토막 난 맹독열매가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것이 보였다.


 맹독 열매의 크기는 평소 그가 알고 있던 크기보다 서너 배 이상 되어보였다.


 “이런 크기의 맹독 열매는 처음 본다. 대체 누가 이렇게 만들었지?”


 그 순간 오공의 뇌리에 도란이 말했던 내셔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에이... 서... 설마...”


 공포에 휩싸인 오공은 자신도 모르게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


 어쩌면 도란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내셔의 짓이 아니라면 이 정도의 크기의 맹독열매를 건드릴 수 있는 생명체는 이 섬에 존재할 리가 없었다.


 “내셔의 짓이 분명하다! 사부님의 말대로 강해지기 위해, 스스로 맹독 열매까지 먹어치우고 있는 것이 틀림없어!”


 오공이 자리를 벗어나기 위해 황급히 몸을 돌렸다.


 그러나 그는 몇 걸음 옮기지 못하고 온 몸이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쿠구구구!


 땅이 갑자기 흔들리기 시작하더니 땅 속에서 뭔가가 흙먼지를 일으키며 무서운 속도로 튀어 올라왔다. 그와 함께 지독한 비린내가 코를 마비시켰다.


 ‘크윽!’


 오공이 본능적으로 몸을 굴렸다.


 콰지직!


 땅속에서 솟아오른 형체는 가공할 만한 속도로 오공의 옆을 스쳐지나가더니 근처에 있던 큰 나무를 두 동강으로 박살내버렸다.


 오공은 그제야 자신을 공격한 형체의 모습을 자세히 살필 수 있었다.


 불길한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내...내셔 남작...!”


 형체의 정체는 틀림없는 내셔였다.


 내셔의 전신은 온통 자주색 껍질로 뒤덮여 있었고, 머리에는 닭 벼슬처럼 돌기가 튀어나와있었다.


 내셔의 길이는 무려 100미터를 넘어보였다.


 오공을 노려보는 여러 개의 눈은 마치 푸른 보석을 박아 놓은 듯 광채를 뿜어냈다. 두 갈래로 갈라진 턱은 쉭쉭 소리를 낼 때마다 기이하게 꿈틀거렸다. 그 모습은 절로 상대방의 혼을 빼놓기에 충분했다.


 “내셔를 직접 보게 될 줄이야!”


 오공은 지금의 상황을 믿을 수가 없었다.


 도란은 내셔의 몸길이는 길어봐야 50미터 정도가 될 것이라고 추측했지만, 눈앞에 보이는 내셔의 몸길이는 무려 100미터에 달했으니, 실로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젠장! 황금석상은 구경도 못해보고 죽게 생겼구나.’


 절망감이 오공을 엄습했다.


 그러나 그는 이를 악물고 정신을 차리기 위해 노력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지금의 위기를 벗어나야만 했다.


 손에 들려있던 해독 포션이 담겨진 병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는 점점 자욱해졌다.


 오공은 내셔가 해독 포션의 냄새 때문에 쉽게 덤벼들지 못할 것이라 예상하고 천천히 뒷걸음질 쳤다.


 그러나 내셔는 오공이 물러서는 거리만큼 서서히 접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