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도 안 돼!’

 

 오공의 공격에 연신 뒤로 물러서는 그녀의 표정은 점점 굳어져갔다.

 

 그녀의 귓가로 오공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하하하! 갑자기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구나!”

 

 레이나는 분한 나머지 눈에 눈물이 맺혔다. 그녀는 자신의 입술을 피가 날정도로 깨물며 사력을 다해 검을 휘둘렀다.

 

 채챙!

 

 쇠봉과 검이 부딪치며 불꽃을 튀기는 그 순간,

 

 “꺅!”

 

 레이나는 몸의 중심을 잃고 바닥에 주저 앉아버렸다.

 

 공격을 퍼붓던 오공의 동작이 얼어붙은 듯 정지되었다.

 

 레이나의 몸이 바닷물에 온통 젖어들었다. 천 옷을 입고 있었기에 물에 젖어버린 옷은 그녀의 몸에 쫙 달라 붙어버렸다.

 

 그녀의 섬세한 몸의 굴곡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버린 것이다.

 

 그 모습을 본 오공은 황급히 눈길을 다른 곳으로 돌렸고, 레이나의 얼굴은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이 변태!”

 

 레이나는 다시 몸을 일으켜 공격했다. 마나를 최대한 끌어 모아 최후의 일격을 가했다. 검을 감싸고 있던 푸른빛의 선명도가 더욱 진해졌다.

 

 오공은 우주류 봉술을 시전하며 막아냈지만 이내 그의 허리 쪽이 화끈해지고 있음을 느꼈다.

 

 “크윽!”

 

 레이나는 그의 허리에서 피가 새어나오는 것을 보자 순간 공격속도를 늦추었다.

 

 오공이 크게 분노했다.

 

 그는 무서운 기세로 ‘파쇄격’을 시전했다. 오공의 쇠봉이 붉은 빛으로 물들며 레이나의 공격을 맞받아쳤다.

 

 깡!

 

 레이나의 손에서 숏쇼드가 튕겨져 날아갔고, 그녀 또한 10미터 뒤로 나가떨어졌다.

 

 오공이 거친 숨을 몰아 내쉬며 상황을 지켜보았다.

 

 힘겹게 일어선 그녀는 떨어진 검을 주워들었다. 그리고 창백해진 얼굴로 비틀거리며 오공에게 다가왔지만 다시 쓰러져버렸다.

 

 오공은 황급히 쓰러지는 레이나의 몸을 부축했다. 하지만 허리에 충격을 받은 그였기에 오공은 레이나의 몸을 끌어안은 채 물 속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그 때문에 레이나의 몸이 오공의 아래에 깔려버렸다.

 

 서로의 몸이 아주 가깝게 밀착되자 깜짝 놀란 레이나는 있는 힘을 다해 오공을 밀쳐내며 일어섰다.

 

 “변태 원숭이!”
 “미...미안!”

 

 화가 잔뜩 난 레이나는 그대로 오공의 뺨을 후려쳤다. 그녀는 증오의 눈빛으로 노려보며 외쳤다.

 

 “오늘의 수치는 절대 잊지 않을 거야! 언젠가 반드시 빚을 갚고 말겠어!”

 

 그 말을 남긴 채 레이나는 어둠 속으로 사라져갔다.

 

 오공은 한참이나 넋이 나간 얼굴로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이 정도까지 일이 심각하게 되리라고는 생각조차 못한 것이다.

 

 “내가 너무 심했나?”

 

 오공은 자책하며 레오나가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제야 허리춤의 통증이 전해졌다. 깊은 상처는 아니었지만 피가 계속 해서 흘러나왔다.

 

 그 순간. 오공은 바닷물 속에서 반짝거리는 뭔가를 발견했다.

 

 그것은 바로 레이나의 검이었다.

 

 오공은 천천히 검을 집어 들었다.

 

 검의 손잡이에 새겨진 룬문자를 확인하자 그의 나직한 탄식이 흘러나왔다.

 


* * *

 


 라이즈 일행이 아이오니아에 온 지 벌써 일주일이 지났다.

 

 첫날 이후 라이즈는 오반과 도란에게 더 이상 전쟁학회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그저 도란의 집에서 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눌 뿐이었다.

 

 그는 하루 종일 도란과 함께 시간을 보냈다. 그것은 도란에게서 자신이 차마 발견하지 못한 점을 찾아내기 위함이었다.

 

 도란은 틈틈이 주민들에게 자신의 지식을 전수해주고 있었다.

 

 라이즈는 며칠 동안 그런 도란의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도란이 전수해주는 지식은 대단한 것이 아닌 평범한 수준의 지식들이었다. 라이즈는 의아하게 생각했다. 지식학회에서 이름을 날렸던 도란이 전수하는 지식이라면, 당연히 남다른 내용일 것이라고 예상했기 때문이었다.

 

 오늘도 상황은 다르지 않았다.

 

 도란은 평범한 지식을 전수해 주고 있었다. 하지만 대다수의 원숭이들은 그런 평범한 지식조차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그나마 도란의 가르침을 이해하는 것은 저 원숭이 뿐이로군.’

 

 라이즈의 시선은 오공에게 향하고 있었다. 그가 예사롭지 않은 눈빛으로 오공을 바라보고 있을 때.

 

 도란이 라이즈를 바라보며 방긋 웃었다.

 

 “어떤가? 짧게나마 자네의 지식을 이들에게 전수해보는 것이...”

 

 라이즈는 껄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의 부탁이라면 마다하지 않겠네.”

 

 승낙한 라이즈는 앞으로 나섰다. 그는 좌중을 살피며 속으로 생각했다.

 

 ‘원숭이들을 가르쳐봐야 얼마나 알겠는가.’

 

 라이즈는 문답식으로 원숭이들을 가르쳤다. 한 가지 주제를 제시하면 그것에 대한 느낌을 묻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라이즈의 질문을 받은 원숭이들은 하나같이 곤혹스러워 하며 제대로 된 답을 말하지 못했다. 하지만 오공은 예외로 그럭저럭 훌륭한 대답을 했다.

 

 라이즈는 점점 질문의 난이도를 높여갔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도란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라이즈는 지금 지식학회의 수준을 가르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라이즈가 이곳 주민들의 지식수준을 시험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챘다.

 

 수준 높은 질문에 결국에는 오공조차도 제대로 된 대답을 하지 못했다.

 

 ‘여기까지군.’

 

 수업이 끝나고, 오공을 비롯한 원숭이들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다.

 

 도란이 방긋 웃었다.

 

 “자네는 이곳의 원숭이들을 모두 학자로 바꾸어놓을 셈인가?”
 “이보게, 도란. 왜 이들에게 그저 평범한 지식들만 전수하고 있는 것인가?”
 “라이즈. 이곳은 지식학회가 아닐세.”

 

 도란은 차분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이들은 그저 살아가는데 필요한 지식만 습득해도 충분하다네.”
 “실은... 가르치면서 속으로 저들을 무시했었네...”
 “하하하... 괜찮네. 저들은 농사와 어업에만 관심이 있으니 당연한 결과가 아니겠는가. 오늘은 차를 마시지 말고 술이나 한잔하세.”

 

 도란은 술상을 준비하기 위해 밖으로 나갔다.

 

 혼자 남은 라이즈는 도란의 연구실에 꽂혀 있는 책들을 살펴보았다. 그는 며칠 동안 이곳의 고서 몇 권을 읽어본 터였다.

 

 고서들의 내용의 대부분은 치료법과 약초에 관한 것이었다.

 

 ‘뭔가 대단한 것을 연구한다고 생각했는데...’

 

 라이즈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괜히 이곳을 찾아왔군...’

 

 지난 이십 년 간 라이즈가 선의의 경쟁자로 생각했던 도란은 제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지식학회 학회장인 피어스가 그토록 높게 평가했던 도란은 이제 존재하지 않았다.

 

 라이즈는 이십 년 전 도란이 지식학회를 떠난 날을 떠올렸다. 그날부터 피어스는 깊은 실의에 빠졌고, 술을 마시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피어스님. 도란은 곧 돌아올 것입니다.]

 

 라이즈의 위로에 피어스는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세상이 바뀌어도 도란은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아마도 내가 죽는 날까지 만나지 못하겠지. 도란과의 인연은 끝이 났지만 이십 년 후 도란의 제자에 의해 새로운 인연이 시작될 것이다.]

 

 술에 취한 피어스의 말이었다.

 

 라이즈는 피어스가 앞날을 예지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만큼 그의 지식수준은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경지에 오른 것이었다.

 

 피어스의 말대로 도란은 학회를 떠난 지 이십 년 동안 돌아오지 않았다.

 

 라이즈는 피어스의 예지능력이 완벽하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뛰어난 도란은 어느새 퇴보했고, 그의 가르침을 받는 사람 중에서 뛰어난 인재는 없어보였다.

 

 라이즈는 오공을 뇌리에 떠올리긴 했지만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그 정도의 지식수준은 대륙에 널리고 널렸다.’

 

 라이즈는 비로소 돌아갈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사실 이곳을 찾아온 정확한 이유는 도란의 지식이 필요했을 뿐, 원숭이들을 발로란 대륙으로 데려가는 것에는 큰 흥미가 없었던 것이다.

 

 그는 창가 쪽으로 걸음을 옮겨 섬의 전경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시야에 큰 나무 아래에 우두커니 서있는 자신의 딸 레이나의 모습이 보였다. 딸의 모습은 평소와는 다르게 어딘가 우울해보였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로구나. 활달하기만한 레이나의 안색이 요 며칠 좋지가 않군.’

 

 순간, 라이즈의 얼굴이 흔들렸다.

 

 오공이 레이나에게 접근하는 것을 본 것이다.

 

 그는 검 한 자루를 레이나에게 건네고 있었다.

 

 ‘레이나의 검이 왜 오공에게?’

 

 라이즈가 의아해했다.

 

 레이나는 검을 받아들더니 한마디 말도 없이 몸을 획 돌려 사라졌다.

 

 오공은 뭔가 그녀에게 할 말이 있어 보이는듯했지만 라이즈가 창가에 서 있는 모습을 발견하고는 황급히 사라졌다.

 

 “확실히 보통의 원숭이들과는 다르다. 그러나 지식으로 보나 무술실력으로 보나 저런 인재는 대륙에 널리고 널렸다. 결코 피어스님이 예언한 도란의 제자는 아니다.”

 

 라이즈는 숨을 길게 내쉬며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수많은 별들이 광채를 내뿜으며 밤하늘을 수놓고 있었다.

 

 “결국, 나 혼자의 힘으로 일어서야하는구나!”

 

 다음날 아침.

 

 라이즈 일행은 오반에게 떠난다는 인사를 한 후 포구에 정박한 범선으로 향했다.

 

 주민들은 모두 나와 그들을 배웅했다.

 

 도란과 오공은 복잡한 시선으로 각자 라이즈와 레이나를 바라보았다.

 

 “도란, 마음이 변한다면 언제든지 찾아오게. 그리고 이곳 사람들도 전쟁학회에 가입하도록 촌장님께 설득시켜주게.”

 

 도란은 말없이 미소만 머금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라이즈가 배 위로 오르기 시작했다.

 

 오공은 더 이상 기회가 없음을 깨닫고 라이즈의 뒤를 따르던 레이나를 불러 세웠다.

 

 “저기....”

 

 레이나가 싸늘한 시선으로 돌아보았다.

 

 “일전에 있었던 일은 내 잘못이야.”
 “.....”

 

 레이나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하지만 그녀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돌아서며 배에 올랐다.

 

 오공은 한숨을 내쉬며 배에 오르는 그녀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화창한 날씨.

 

 범선은 물살을 가르며 포구와 점점 멀어져갔다.

 

 멀어지는 배를 보며 오공은 알 수 없는 아쉬움을 느꼈다.

 

 옆에 서있던 도란이 중얼거렸다.

 

 “세월이 많이 지났구나...”

 

 라이즈의 발전된 모습을 봤던 도란은 순간, 자신이 초라해지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십 년이 지나버린 지금,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각자 살아가는 방식이 다를 터...”

 

 도란은 스스로를 위로하며 중얼거렸다.

 

 그는 천천히 몸을 돌려 걷기 시작했다. 오공은 도란의 뒷모습을 보며 오늘따라 그의 어깨가 한없이 쳐져있음을 알 수 있었다.

 

 범선은 이제 보이지도 않을 만큼 작은 점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오공이 바라보고 있는 것은 범선이 아닌 수면 위로 떠오르는 태양이었다.

 

 태양을 바라보며 오공은 결심했다.

 

 “난 절대 평생을 이 섬에서 보내지 않을 것이다.”

 

 지난 며칠 동안 겪었던 일들이 그의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라이즈의 마법... 그리고 레이나의 대결...
 

 바닷물에 젖은 그녀의 몸... 그녀의 얼굴...

 

 “반드시 대륙으로 갈 것이다! 반드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