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아 스토리를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그리고 이 게임이 롱런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진 사람으로서 쿠르잔 스토리를 계속 보면서 생각한 것들을 정리하고자 함.

여기서는 본인 뿐만 아니라 여러 모험가들도 느꼈을 1) 쿠르잔 스토리에서 느꼈던 기시감과 2) 쿠르잔 스토리에서 느낀 '짜치다'를 다루려고 함.

1. 쿠르잔 스토리에서 느꼈던 기시감

1) 금강선 전 디렉터의 고민, '항해'
  이전 라이브 방송에서 금강선 전 디렉터, 현 CCO가 앞으로 벌어질 로아의 스토리와 관련하여 밝혔던 게 한 가지 있다. 검은이빨이나 크림슨네일과 같은 '항해' 관련 스토리도 아크라시아의 스토리를 놓고 볼 때 중요한 지분을 차지하고 있어서 언젠가는 등장해야만 하는데, 그 시기와 방법에 대해 생각해두고 있다는 것이었다. 라이브 방송의 시기와 흐름 상 '쿠르잔 남부'를 두고 한 말인 것은 예상했지만, 이제 모두가 그 결과가 어떤 지 알고 있다.
  모두 이미 알고 있다시피, 이번 쿠르잔 남부 스토리는 크게 2부로 나뉘어져 있다. 초중반의 항해와 중후반의 쿠르잔. 항해는 언젠가 등장해야만 했지만, 그 방식에 대해서는 참 애매했을 것이다. 항해 콘텐츠로 기에나의 성물과 관련한 떡밥이나 스토리를 풀자니 이미 사멸해버린 콘텐츠이고, 그렇다고 독자적인 스토리의 분기로 나누어 놓자니 그러기에는 어쩔 수 없이 거쳐가야 하는 관문 격에 가깝다. 한참 동안 군단장이나 엘가시아, 로스트아크의 소재 등에 관심이 있던 유저들의 니즈를 만족시키기에는 어려운, 그러나 아크라시아에 '바다'가 여전히 존재하는 한 언젠가는 반드시 등장해야만 하는 '항해' 스토리의 존재는 그 자체로 계륵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스토리팀의 입장이 되어 한번 생각해보자.
  이 계륵 같은 스토리를 어떻게 넘기는 게 좋을까?

  혹, '대전쟁'이 벌어지는 대륙에 입장하기 위한 '관문'처럼 보인다면, 항해 스토리도 그럭저럭 먹을 만해지지 않을까? 여기에 적당한 연출을 얹는다면, 소재는 가지더라도 '제육 소스를 얹은' 가지맛일 것이다.
  스토리팀은 이렇게 생각한 게 아닐까 싶다. 이 추측이 맞든, 틀리든 상관없이 결론적으로 쿠르잔 스토리는 전반부 항해, 후반부 쿠르잔으로 상당히 압축되었다.

  그 결과, 한 대륙의 스토리 안에 '도입 ~ 결말'이 두 개씩 들어 있는 기묘한 스토리가 되었다. 이렇게 될 경우, 반드시 스토리에 몰입할 시간이 부족해지며 흔히 말하는 '급전개'의 양상이 나타날 수밖에 없다. 갑자기 독기 때문에 잠식당한 슈테른, 어느샌가 독기가 잠깐 사이에 온 바다로 퍼져서 해일처럼 닥치는 전개, 그 와중에 에키드나 1넴 보스의 어필. 어떻게든 항해 소재를 쿠르잔에서 벌어지는 사건들과 엮으려고 한 시도들이다. 그것들이 다른 유저들에게는 얼마나 잘 어필이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본인에게는 전반부의 좋은 연출에도 불구하고 급전개의 아쉬움을 남긴 것들이다.
(한편, 쿠르잔에서의 대표적인 급전개의 예시는 바로 렌을 바다로 떠밀친 그 데런이 있다. 몇 번이고 쿠르잔 스토리를 돌려봤지만, 아직도 이 녀석은 이름이 기억 안 날 정도로 뜬금없었고 임팩트 없었다.)

  ???: 전체 분량으로 따지면 이전 대륙과 별 차이가 없다! 억까가 아니냐!

  확실히, 전체 분량으로 따진다면 분명 이번 쿠르잔 스토리는 큰 차이는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건 '전체 분량'만을 두고 얘기했을 때의 이야기이다. 플레이어가 실제 쿠르잔 대륙에 진입해서 대륙과 관련한 사건 사고와 디테일을 경험하는 건, 이전 분량의 절반치만큼밖에 되지 않는다.

  즉, 우리가 이전 대륙에서는 5시간에 걸쳐서 그 대륙의 세계관과 디테일을 경험하고 몰입할 수 있었다면, 이번에는 2시간에 걸쳐서 그 모든 걸 경험해야만 한다는 소리가 된다. 그리고 그 주제들이 애초부터 하나가 아니라, 두 개로 나뉘어 있어서 사실상 우리는 5시간 안에 두 개의 대륙 스토리를 보는 듯한 경험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쿠르잔 대륙에 진입하자마자 갑자기 힘이 빠지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면, 그건 착각이 아니다. 우리는 방금까지 '항해'라는 단편 소설의 결말부를 방금 막 끝내고, '쿠르잔'이라는 새 책 표지를 이제 막 넘긴 참이기 때문이다.
('항해 스토리 다 봤으면, 쿠르잔도 먹어야지~' 하면서 헐레벌떡 쫓아온 아만 택시가 새삼 생각난다. 아만 기사님께서는 우리에게서 결말의 여운이나 디테일도 볼 만한 여지를 앗아갔다.) 

2) 데런, 데런 또 데런.
  우리 아크라시아의 아픈 손가락이 있다면, 분명 그건 데런일 것이다. 근데 페이튼과 플레체에 걸쳐서 쿠르잔에서까지 똑같은 모습을 보고 있어야 하는 건... 참, 뭐랄까. TV에서 저 먼 아프리카에서 어렵게 하루를 살아가는 어린 아이를 위한 후원 광고를 보는 듯한 기분이다. 참 안타깝긴 하지만, 당장에라도 후원을 통해서 도울 수 있다는 것도 알고 있지만, TV 광고라는 특성 상 반복적으로 같은 내용이 나올 수밖에 없고, 인간의 본능은 새롭게 접하는 정보의 패턴을 찾으려 하고, 그렇게 찾아서 확립한 패턴보다는 새로운 자극이나 문물에 반응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보니 필연적으로 무덤덤해질 수밖에 없다. 아이들은 안타깝다만 그 아이들이 반복적으로 나오는 TV 광고에 대해서는 건조해진다는 것이다.
  데런의 처지도 똑같다. 달라진 게 없다. 이 녀석들은 페이튼에서도 불쌍했고, 플레체에서도 불쌍했다. 어려운 상황에 놓인 종족이 의지를 불살라 힘을 합쳐 저항하는 모습은 사실 데런 뿐만 아니라 로웬이나 볼다이크, 엘가시아에서도 비슷하게나마 본 적이 있다. 모험가들은 이미 얘네들이 불쌍한 건 알고 있다. 그래서 본인이 내심 기대했던 건 '얘가 우리 편일까, 아니면 쟤네 편일까?'하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뭔가 좀 더 위협적이고 잇속에 충실한 데런의 스토리였다. 모험가에게 필요한 건 다 짜내서 나오지 않는 눈물 한 방울이 아니라, 카마인과 같이 동료인 듯 아닌 듯한 팽팽한 긴장 속 동맹 관계에서 삼키는 침 한 움큼이다.
  아사르와 아베스타 간의 차이점도 크게 와닿지 않는다는 점도 지루함에 한 몫을 한다. 충동이냐 억제냐의 차이지만, 결국 '우리는 악마가 아니라 인간이다'로 결부되는 맥락이다. 그럼에도 아베스타의 구심점이었던 사이카의 희생과 비교해서 아사르에 매력적인 캐릭터가 있었던 것도 아니다. 물론, NPC의 희생은 있었다. 하지만, 인물의 희생은 없었다. 모험가가 사이카처럼, 디오네게스처럼, 라우리엘처럼, 마레가처럼 만나고 몰입한 인물의 희생도 없었다.

  이처럼 여러 방면에서 아사르의 서사는 아베스타의 열화판처럼 보일 수밖에 없다. 엘네아드 수복전에서 '검은 비 평원'의 모습이 떠올랐지만, 무언가 부족한 느낌이 들었다면, 이게 그 이유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3) 마블과 쿠르잔
  쿠르잔 스토리에서 경험한 이 모든 문제는 하나의 기시감과 연관된다. 2024년, 무수한 콘텐츠를 접한 대중에겐 이미 익숙한 이슈가 하나 있다. 마블 시네마틱이 엔드 게임 이후로 힘이 쭉 빠진다는 점. 그리고 점점 시간이 지날수록 MCU를 따라잡기 힘들어진다는 점. 사실, 여기에는 마블 영화(사실, 마블 뿐만 아니라 고유의 세계관을 가진 원작이 있는 콘텐츠에서 발견되는 문제)에서 점점 나타나는 고질적인 문제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너무 많다"
  제한된 시간이나 규격 내로 방대한 이야기를 집어 넣으려다가 실패한 사례들이 낳은 기묘한 사건들이 얼마나 많은지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우리 엄마 마사? 너네 엄마 마사?)
  그리고 쿠르잔 스토리도 동일한 문제로 진통을 겪고 있다. 바르칸과 에버그레이스 얘기도 해야 되지, 다르키엘과 에키드나 얘기도 하면서 검은이빨과 칼바서스도 얘기해야 하지, 거기에 떠밀려온 데런(렌) 얘기도 해야 하지, 그 와중에 바다에 생긴 독기 해결하려고 기에나의 성물 얘기도 해야 하지, 기에나의 성물 위치 알려고 포시타 얘기도 하면서 해저 도시 떡밥도 굴려야지. 이 모든 걸 끝내고 쿠르잔 얘기까지...
  어떻게든 항해 스토리를 편입하기 위한 노력이 결국 부작용을 낳은 게 아닌가 싶다.
  부디, 이번에 느꼈던 마블에서의 기시감이 쿠르잔 남부 한 번으로만 끝나기를 바란다.


2. 쿠르잔 연출에서 느낀 '짜치다'

1) 만세, 벌러덩 좀 그만...
  쿠르잔 스토리를 보면서 이전 대륙 스토리와 비교해서 분량이 모자라거나 연출이 모자라지는 않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노하우가 더해져서 최대한 언리얼 3의 한계를 넘어서려는 시도들은 여전히 있었다...라고 넘기기엔, 이젠 회초리를 들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언리얼 엔진 교체가 현실적으로 어려운 상황이고, 로아 개발팀이 언리얼 엔진 3를 끝까지 활용할 의지를 갖고 있다면 이제는 유저들이 당당히 요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로아에서 몰입을 방해하는 오래된 모션들이나 요소들을 개선하라!"

  작성자는 로아 고인물이 아니다보니, 스토리 몰입을 방해하는 요소들이 얼마나 더 많이 있는지는 정확히 알지 못하지만, 인벤 커뮤니티에 놀림거리처럼 올라오는 몇몇 모션이나 요소들이 있다. 글을 쓰면서 간단히 생각해보아도, 애니츠의 까꿍, 벌러덩, 슈샤이어의 벌러덩, 실린의 만세 포즈 등등이 있다. 숙제를 돌릴 때는 간단한 웃음거리가 되어서 소소한 재미가 있겠다만, 정작 진지한 스토리나 슬픈 장면에서도 나온다면 짜증이 나고 몰입에 방해가 된다.

  우주에서 차원의 틈을 막는 에버그레이스로 향할 때 실린이 '만세~'하면서 슈웅 올라가는 장면. 이런 장면들은 반드시 고쳐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건 데헌이나 건슬이 직업 고유의 모션으로 인해서 총을 든 채로 악수하던 시절과 같은 맥락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언제까지고 '그래도 언리얼 3의 한계까지 끌어올린 거니까'로 넘어가야 하는가? 다른 종족이나 모션, 요소들처럼 충분히 개선할 수 있다면, 응당 그래야 하는 게 맞다. 

2) 어디서 나온 신기술이야 이게?
  카멘 4관 클리어 컷신에서도 어렴풋이 느꼈지만, 이번 쿠르잔 연출에서 확신을 갖게 되었다. 캐릭터나 누군가 쓰는 애매한 기술에 대해서 뜬금없는 연출이 나타날 때가 있다. (이것마저도 언리얼 3의 한계라고 할 수는 없다)

- 카멘의 공격을 튕겨내고, 에스더들과 모험가가 갑자기 무지갯빛 에너지를 모아 카멘에게 발사하는 장면
: 드래곤볼 원기옥이 생각나서 웃겼다. '모두가 힘을 합쳐서 이겨낸다'라는 추상적인 스토리보드의 내용을 어떻게 구현해야 할지 머리를 싸매다가 결국 포기해서, '대충 뭐 서로 바라보고 고개 끄덕이고 무지개 반사하는 걸로 하죠'로 결론이 난 것만 같은 이 짜치는 연출은. 진짜 너무 아쉬웠다. 카멘 분위기나 테마나 컨셉이나 다 좋았는데, 그걸 이겨낸 게 '무지개 반사'라니...!

- 베히모스 발을 묶은 건가...? 이긴 건가...? 왜...?
: 도저히 비주얼적으로 납득이 안 간다. 타무트가 베히모스의 발을 묶는 장면에서 사슬이 발에 그냥 묶였을 뿐, 다른 것에 매인 게 아닌데 왜 베히모스는 운신이 제한되는가? 어떤 마법이나 기술의 효과 때문에 운신이 제한되었다는 걸 표현하고 싶었다면 적어도 그 사슬이 지면으로부터 튀어나온 것처럼 연출하는 게 맞지 않나? 자꾸 언리얼 3의 한계라는 말로 얼렁뚱땅 넘어가려고 하는 것 같아서 안 되겠다. 

- 의미 없이 시간을 느리게 해서 보여주는 장면(?)이 너무 많다.
: 스토리 내내 등장하는 컷신마다 멍하니 서 있는 렌의 모습(아마 내적 갈등 등을 표현하려고 했던 것 같지만, 사실 렌의 내적 갈등이 쿠르잔에서 그렇게 의미 있게 다가오지도 않았다. 이는 앞전에 설명한 '급전개'와도 연관)베히모스의 공격을 막으려 하는 아만의 모습. 그러다가 갑자기 순식간에 지나가는 베히모스의 공격 등. 조금은 텀을 더 줄여도 될 법한 장면이 조금 있는 것 같다. (쿠르잔에서 베히모스가 첫 등장하는 슬로우 모션과 하셈의 죽음은 기가막히게 멋있었지만, 이것들 외의 슬로우 모션이나 씬에는 효용이 없어 보였다.)

  엘가시아 때도 사실 빛의 눈을 막기 위해서 모험가가 빛의 눈을 향해 점프해서 뛰어드는(?) 모습은 아직도 이상하다. 점프해서 기존의 스킬을 사용하든가, 차라리 점프 공격이라도 하든가, 로아 연출팀에서 싸울 때마다 잘 써먹는 에너지파(?) 같은 걸 날린다든가. 그런 걸로 대체할 순 없었을까? 굳이 나를 빛의 눈으로부터 보호해주는 카단의 머리를 뛰어 넘는 덩크 씬으로 만들어야만 했는가...

  나중에 쿠르잔 북부에서는 적군과 아군 간에 제발 어린애들이 장난감 몸통 박치기 같은 공격으로 투닥투닥 거리는 모습처럼 싸우지 않았으면 한다. 나는 아직도 불안하다. 나중에 질서와 혼돈의 가디언들이 싸움을 벌이는 장면에서 '레기오로스가 밀치자 소나벨은 으악하고 밀려났다' 같은, 몸통박치기가 전부인 포켓몬스터 같은 지루한 장면을 보게 될까봐.

포켓몬스터라면, 적어도 피카츄가 백만 볼트라도 쓰는 건 봐야지 않겠는가?


* * *


  사실, 쿠르잔 남부가 김상복 팀장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살짝 고구마 단계라는 점도 감안하고, 에키드나 레이드에서 뭔가 전쟁 같은 절정부가 탁 터져 나오고, 베히모스 레이드에서 '캬 이궈거든'하면서 볼 제 자신을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장 내가 이번 쿠르잔 스토리에서 느꼈던 걸 무시하거나 부정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고, 또 그걸 유저로서 가만히 냅두면 안 된다는 생각에 이렇게 글을 씀.

다른 분들도 쿠르잔 스토리가 어땠는지 투표나 댓글로 자유롭게 남겨주시면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