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년전 이야기다.

 

2003년 8월, 한 사내가 당시 지상파 장수 프로그램에 출연했다.

그 당시 주제는 게임중독이었고, 출연한 사내는 대한민국에서 게임으로 둘째라면 서러울 사람이었다.

 

진행자들은, 그 사내에게 질문을 던졌다.

 

사이버머니 1억정도 있으세요?

PK하면 오프라인에서도 충동이 생기나요?

 

그 사내는 방송 카메라를 마주보며, 게임중독자들을 대표했고, 폐인을 대표했고, 백수를 대표했다.

그리고, 후에 이런 방송일 줄 몰랐다고 토로했고, 이 방송을 본 수많은 사람들은 분개했다.

 

그 사내는 임요환이었다.

2003년, 전성기가 지났다고 평가받더라도, 스타크래프트1의 상징과도 같은 인물이었고, 신주영-이기석으로 출발해온 '프로게이머'라는 직업을 가장 널리 알린 사람이다. 프로게이머로서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고 있었고, 태동하기 시작한 E-Sports의 상징과도 같은 인물이었다.

그리고 그는 아침마당에서 '백수 폐인'취급을 받았다.

 

물론, 이 사태는 진행자나 작가의 무지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게임에 대한 몰이해와, E-Sports에 대한 무관심, 프로게이머에 대한 선입견이 불러온 참사였다.

하지만 냉험하게, 이것은 그 당시 사회의 시각을 단편적으로 보여준 사건이었다.

아무리 많은 이들이 보고 즐기더라도, 게임은 게임일 뿐이고, 애들 놀이일 뿐이고, 장난일 뿐이고, 할짓 없는 사람이 모여서 하는 소일거리에 불과한 것이었다. 이를 직업으로 삼는 사람들은 그저 '한심한'사람일 뿐이었다.

 

 

그리고 그 해 겨울, 임요환은 청와대에 초청되었다.

고위 관료와 정치인이 모인 자리, 말쑥하게 차려입은 정장들이 돌아다니는 곳에서 임요환은

 

유니폼을 입고 있었다.

 

자신의 직업, 프로게이머에 대한 자부심이었고, 아직 성숙하지 못한 그 분야를 더욱 알리고자 하는 움직임이었다.

프로게이머라는 직업은 더 많은 이들에게 인정받기 시작했다.

 

1년 뒤, 임요환의 팬카페 회원 수는 50만 명을 돌파했다.

2년 뒤, 광안리에서는 '백수 폐인'들의 결승전을 보기 위해, 10만 명이 운집했다.

3년 뒤, 초등학생들의 희망직업 설문조사에서 프로게이머는 1위를 차지했다.

 

이 판은 더 이상 애들 놀이터가 아니었다.

SK, CJ, KT, 삼성, STX, 르까프, 팬택 등 수 많은 기업이 이들을 후원하기 위해 팀을 창단했고

신한은행을 비롯한 대기업들이 년단위로 리그를 지원했고

공군은 특기병 모집을 통해 상무팀을 창단했다.

 

이들이 본 것은 젊음의 에너지였고, 정정당당한 승부였다.

기업들은 '젊음'이라는 에너지로 E-Sports를 후원했고, E-Sports는 당당한 문화로 자리잡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10년 넘게 쌓아온 공들인 탑은 단 한순간에 무너졌다.

원종서, 마재윤 등 현역 선수들이 대거 개입한 승부조작 사태는, 이 판이 얼마나 약하게 서있었는지를 보여주었다.

젊음의 이미지는 훼손되었고, 기업들은 후원을 중단했고 많은 팀이 해체되었다.

악재가 겹쳤던 MBC게임은 폐국되었고, 온게임넷 역시 리그를 유지할 스폰서를 구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많은 이들이 '문화'라고 당당히 생각해왔던 E-Sports는, 아직 더 자라야 할 새싹에 불과했다.

그리고 그 새싹은 승부조작이라는 태풍을 견디지 못했다.

 

승부조작이 일어난 지 5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커다란 태풍을 겪었지만, E-Sports는 끝나지 않았다.

스타크래프트1의 쇠퇴와 함께 떠오른 LOL은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는 디딤돌이었다.

LOL은 한국, 중국, 북미, 유럽 등 전통적인 E-Sports 매니아 지역은 물론이고 중앙아시아, 남미, 동남아 등 E-Sports의 변방이었던 지역까지 사로잡았으며, 전세계를 열광하게 만들었다.

 

더 다양한 국가에서, 더 다양한 팀들이 창단되고 더 다양한 리그가 진행되고 있다.

드디어, E-Sports는 당당한 하나의 문화가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압도적인 상금을 자랑하는 DOTA2, 꾸준히 사랑받는 스타크래프트2도 당당하게 그 위세를 이어가고 있지만, 현재 E-Sports를 이끌어가는 대표주자는 LOL이라는 것을 부정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 LOL에서 프로게이머는 무방비로 노출되고 있다.

LOL 프로게이머들의 연습은 매우 독특한 시스템이다. 1:1이라는 특성을 지니고 있으며 연습생, 2군이 매우 많았던 스타크래프트1같은 경우, 팀 내 연습이 주가 되었고 가끔 타 팀의 선수와 연습을 진행하곤 했다.

프로게이머는 프로게이머와 연습을 진행했고, 일반인과의 접촉은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5:5 팀게임인 LOL은 팀과 팀 간의 스크림 역시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지만, 상당한 시간을 솔로랭크에 투자한다.

다양한 상황을 익히고, 피지컬을 끌어올리며, 챔프폭을 넓히기 위한 공간으로 솔로 랭크를 선택한 것이다.

그리고 그 솔로랭크에서, 프로게이머들은 다른 프로게이머 뿐 아니라 수많은 일반유저와 만나고, 같이 게임을 진행한다.

'프로' 선수가 일반인과 함께 어울려 연습을 하는 것은, 여느 스포츠에서 찾아보기 힘든 희귀한 광경이다.

 

 

그리고 그 곳에서 종종, 프로게이머들은 철저하게 유린당한다.

 

http://www.inven.co.kr/board/powerbbs.php?come_idx=3866&l=5102446

http://www.inven.co.kr/board/powerbbs.php?come_idx=3866&l=5193976

 

 

보름동안 있었던 두 사건이다.

삼성의 큐베에게는 스트리밍 하고 있는 솔로랭크 자리에서 삼성 선수 전체를 싸잡아 비난하는 욕을 퍼부었고

C9의 스니키에게는, 한국에 전지훈련에 왔음에도 영어로 가차없는 욕을 날렸다.

비단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페이커를 상대로 입에 담기조차 힘들 심한 욕을 한 사건도 있었다.

다데는 시즌3롤드컵 직후 펼쳐진 배치고사에서, 수많은 조롱을 들으며 솔로랭크를 진행했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그들은 그 욕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다.

 

트래쉬토크나, 인터뷰의 도발은 경기의 큰 일환 중 하나로 바라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조롱은 일반인이 프로선수를 대상으로 한 일방적인 모욕이다.

 

 

많은 프로게이머들은 솔로랭크의 언사를 통해 물의를 빚은 적이 있다.

데뷔 전에 거친 입으로 화제가 되었던 선수도 많았고, 데뷔 후에 솔로랭크에서 부적절한 다툼이나 행동을 한 선수들도 많았다. 물론 LOL은 열려있는 공간이고, 선수들의 비판받아 마땅할 행동들은 쉽게 감춰지지 않는다.

 

비판을 하는 이유는 간단하면서 명쾌하다. 그들은 '프로'니까. 스폰서의 이름을 걸고 있는 프로이기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E-Sports라는 성장하고 있는 문화의 얼굴이다. 프로게이머들의 행동은 수많은 유저의 귀감이 되고, 모범이 된다. 그만큼 그들이 행하는 부적절한 행동은, 이를 보는 많은 유저들의 모방 가능성을 높일 수 있다.

 

솔로랭크라는 개방된 공간에서, 프로로써 해서는 안되는 언사는 자제해야 하는게, 프로의 책임이자 도의이다.

 

 

그러나, 그들에게 권리란 없다.

이름도, 얼굴도 모두 알려진 그들에게 아무리 유저들이 욕을 하고 조롱하더라도, 그들은 참아야만 한다.

설령 한 유저가 정지를 당하더라도, 더 많은 유저들이 그들을 조롱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고, 영원히 멈추지 않을 것이다.

커뮤니티에서 펼쳐지는 조롱들 역시 심각한 문제지만, 솔로랭크에서는 선수를 향해 직접적으로 욕설이 쏟아부어진다.

 

프로게이머에게 남은 존중은 없다. 아침마당에 임요환이 출현했을 때, 게임중독자 백수폐인으로 불려졌었고

이를 타개하기 위해 수많은 팬과, 선수와, 관계자들은 끊임없이 노력했다.

마침내 프로게이머는 떳떳한 하나의 직업이 되었고, E-Sports는 하나의 문화가 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

 

그러나 현재 LOL의 모습은, E-Sports의 얼굴이자 상징인 프로게이머들을 철저히 짓밟고 조롱하고 있다.

우리 스스로 우리가 쌓아온 E-Sports의 위상을 추락시키고 있는 것이다.

문화로 자리잡기 위해선 억겁의 시간이 필요하지만, 이것이 무너지는데는 찰나의 시간이면 족하다.

아직까지도 게임에 대한 회의적인 시각이 존재하는 것이 지금의 냉정한 상황이다

연습 공간에서조차 일반인유저에게 조롱받는 이들이 '프로'라면, 이미 회의적인 시각의 외부인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당신들은, E-Sports가 당당한 문화이자 스포츠로, 전 세계의 젊은이들이 하나 될 수 있는 수단으로써 남았으면 좋겠는가?

아니면 단지 백수폐인 중독자들이 즐기는 애들 장난으로 남았으면 좋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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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알려진 바로는, 라이엇 코리아는 이런 악성 유저에 대한 제재를 거의 진행하지 않고 있습니다.

 

혹시, 프로팀 관계자들이 이 글을 보게 된다면, 한가지 부탁하고 싶습니다.

제발, 꼭, 반드시 악성유저들에 대한 책임을 물어주시길 원합니다.

 

이건 단지 한 선수에 대한, 한 팀에 대한 모욕이 아닙니다.

우리가 만들어낸 E-Sports에 대한 모욕이고, 도전이자 훼손입니다.

 

E-Sports에 대한 애정은 관계자분들과 선수들이 우리 팬 이상으로 가지고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E-Sports를 위해서라도, 악성유저에 대한 대처를 부탁드립니다.

프로팀의 제재가 시작된다면, LOL이 최소한 프로선수들이 연습할 공간만이라도 깨끗해 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